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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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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당 선언

현실보다 흥미로운 정치 상상 ‘허풍선 의원의 정책개발실’ 첫 회…

정치세력화한 독신주의자들의 창당을 상상하다
등록 2011-03-31 14:00 수정 2020-05-03 04:26

망상은 달콤하고, 그게 죄라면 더 달콤하겠다. 가령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들 말이다. 왕의 아들이 아닌 자가 평화롭게 한 나라의 통치권을 넘겨받는다. 여자라는 하등 동물이 그 통치권자를 결정하는 투표에 참여한다. 그 여자들이 벌거벗은 몸을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노예 검둥이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 아뿔싸, 예를 잘못 들었나 보다. 친구가 말하기를 이런 망상들이 모두 현실이 되어버렸단다. 재미없다.
더 재미없는 건 지금의 정치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수권세력이든 시민운동단체든, 수십 년간 해오던 똑같은 말만 반복한다. 정치를 재미로 하는 건 아니겠지만, 나 같은 장외 관람객의 흥미를 끌 의외성이 없다. 투표 때마다 2번이냐 4번이냐, 객관식 답안지에 ‘찍기’나 하고 있자니 더 심심하다. 그래서 나는 망상(妄想)하기로 했다. 여도 야도, 극좌도 극우도 뜨악해할 만한 정치적 주장과 사건들을.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혼자 사는 게 죄입니까?”

2천 하고도 모년 모월 모일, 강남 갑부와 사회 지도층의 집결처로 알려진 순봉헌 교회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린다. 신랑은 재벌가 3세인 조수돌, 신부는 인기 정상의 여배우 이혜림. 교회 주변은 각계의 축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경찰기동대 5개 중대가 동원돼 교통을 통제하고, 8개 시중은행이 비상업무 체제로 축의금을 받는다. 엠넷 시상식을 방불케 하는 축하 무대가 펼쳐지고, 드디어 혼인 서약 시간. 신랑은 신부의 손을 잡더니 우렁차게 말한다. “나 조수돌은 그대 이혜림을 아내로 맞이… 하지 않을 것이며, 오늘은 물론 평생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신부가 마이크를 잡아 외친다.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 독신당(獨身黨)의 창당을 선언합니다.”

결혼식 취재로 모인 연예부 기자와 리포터들은 갑작스레 정치 뉴스를 내보내게 된다. “경찰은 즉각 진압에 나서 조수돌과 이혜림을 국가보안법 위반과 불법 집회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이들은 서울 홍제동 대공분실로 옮겨졌다가, ‘빨갱이가 아닌데 왜 우리가 맡느냐’는 담당 수사관들의 항의로 별도의 수사팀에 넘겨졌습니다.” 하객 신분으로 교회에 온 경찰 수뇌부가 인터뷰에 응한다. “오래전부터 암약해오던 독신주의자 정치세력화 조직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현존하는 가족과 결혼제도를 붕괴시키려는 극악한 테러리스트입니다.”

그날 독신당 초대 당수를 자처하는 김홀이 100여 명의 당원과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나타난다. 독신당의 중앙당 창당위원회 결성을 신고하기 위해서다. 선관위는 신고서 접수를 거부한다. “정당법 제1장 제2조에서 ‘정당’이라 함은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는 조직으로 규정합니다. 독신당은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겠다는 무책임한 집단 아닙니까?” 선관위의 신고를 받은 경찰특공대와 독신당원들 사이의 몸싸움이 이어진다. 김홀 당수는 즉시 대피해 인터넷 방송을 통해 ‘독신당 선언’을 한다.

독신당의 강령은 즉시 퍼져나간다. ‘결혼과 출산을 해야만 국민인가? 우리는 독신자에게 가해오는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 ‘저출산 위기설은 미래 세대에 기생하려는 현 세대의 이기주의다. 인구 폭발이야말로 대재앙이다.’ ‘주택·환경 문제로 고통받는 대한민국은 무결혼·무출산으로 정화의 시기에 들어가야 한다. 남한 인구 1천만 명이 목표다.’ 창당 발기인인 서울 신림동 고시원의 박기인씨는 말한다. “아 진짜, 혼자 사는 게 뭐 죄인이냐고요? 1인 세대주는 전세대출도 안 되고, 아이 없다고 세금도 바가지 씌우고…. 아, 그럴 거면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결혼을 시켜주든지.” 박씨는 독신당 영입 대상으로 가수 아이뮤를 꼽는다. “아직은 연애 생각 없다고 하더라고요. 계속 그런 쪽(연애)은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요.”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공장을 폭파하라

각 언론의 반응은 이렇다. “철부지 독신자들은 철천지 매국노다.” “공산주의가 물러난 틈으로 독신주의가 몰려온다.” 여야가 이렇게 한목소리를 모은 적이 없다. 어느 당 대변인은 사견임을 전제한 채 말한다. “차기 대권 말입니다. 총각·처녀는 물론이고, 자식이 기본 셋이 안 되면 후보로 나올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북한까지 이례적으로 성명을 냈다. “지금 남조선 처녀·총각들이 굶주리다 못해 성욕이 감퇴하여 헛소리를 하고 있다. 그게 얼마나 좋은데.”

2주일 뒤 ‘순봉헌 교회 위장 결혼식 사건’의 조수돌과 이혜림이 기자회견을 한다. 이들은 독신자에게 세뇌된 과거를 반성하고 회견장에서 바로 전통 혼례를 치른 뒤, 한 달간의 감금 합방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미 천문학적인 액수의 축의금이 독신당에 넘어간 상태다. 독신당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당세 확장에 나선다.

독신당 내에도 여러 정파가 존재한다. 가장 온건한 ‘캠페인파’는 시민단체 수준의 활동을 벌인다. 커플 이벤트 주도 업체 불매운동, 연극 무대에서 프러포즈하는 경우 환불 요구, 결혼정보업체 모델 신상 털기로 유부남이라는 사실 알리기 등이다. 밸런타인데이 직전 초콜릿 공장에 폭발물을 설치하다 체포된 장모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독신당에 들어간 거는요. 거기는 다 싱글들이라 짝을 구하기 쉬울 것 같아서였어요. 근데 여성 당원은 접촉도 못하게 하고 그래서 더 짜증이 나서….” 세 자녀 이상을 둔 가족에게 전기요금을 감면해주는 정책에 항의하는 운동도 있다. 이 가정을 방문할 때 노트북·휴대전화 등 가전제품을 잔뜩 가져가 충전하는 것이다. 결국 이 운동은 당 차원에서 금지됐는데, 그 집 자녀들에게 ‘결혼 못하면 저렇게 진상이 되는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진성 독신당원들은 태어난 이후 결혼은 물론 연애를 한 번 안 해본 사람들로 구성됐다. ‘무적의 솔로부대’라는 테러리스트들은 주말마다 군복을 입고 결혼식장을 찾아간다. 그리고 신부 쪽 하객석에서 튀어나와 “영숙아, 내 다음달에 제대한다. 그걸 못 기다리고 고무신 거꾸로 신나?”라며 대성통곡해서 파혼을 이끌어낸다. 솔로부대 일원이 군복무자 애인 모임인 ‘강철 고무신’에 잠입해 연인 관계를 끊는 공작을 하다가 거기 있는 여성과 정분이 나서 탈당하는 사건도 발생한다.

극좌는 극우를 부른다. 독신당의 과격한 활동은 결국 ‘다산당’(多産黨)의 출현을 가져온다. “독신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로마시대는 물론, 프랑스혁명 직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이들은 결혼 뒤 한 자녀 이상을 낳은 국민에게만 투표권을 주고, 각급 학교에서 국민의례 대신 ‘저는 20살만 되면 필사적으로 짝을 찾아, 30살 전에 아이 셋을 낳겠습니다’라는 결혼 서약 의례를 강제하는 법안을 상정한다. 장외의 행동 역시 과격해진다. 독신당원 부모로 구성된 ‘대한민국 불효자 퇴치 연합’은 자식을 집안에 감금하는데, 여러 자녀가 당원인 경우에는 힘이 딸린다고 고백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낳지 말걸 그랬어.”

연애와 탈당 러시로 독신당은 무너지고…

내부의 분파 투쟁과 외부의 탄압 속에 독신당은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결정타는 그들 자신이 야심차게 기획한 초대형 행사에서 터져나온다. 독신당 창당 1주년 기념으로 서울 보라매공원을 점거한 수만 명의 독신당원들은 대대적인 ‘귀순용사 환영회’를 연다. 그동안의 치밀한 공작을 통해 이혼에 성공하여 독신자 세계로 컴백하게 된 200여 쌍의 ‘돌싱’을 맞이하는 행사를 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주최 쪽의 실수로 전남편과 전부인을 나란히 줄지어 세워두고 만다. 그들 사이의 사소한 말다툼은 결국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난장판으로 이어진다. 이때 독신당 내 염문을 폭로한 정체불명의 전단지가 살포되면서 수만 명의 당원이 서로 난투극을 벌인다.

독신당은 이후 잔존 세력이 활동을 이어가지만, 당원 사이의 연애와 탈당 러시가 이어져 붕괴하고 만다. 초대 당수 김홀은 독신당원 명부를 결혼정보업체에 팔아넘긴 뒤 남태평양으로 망명하는데, 두 명의 아내에게서 낳은 3남2녀를 차세대 국제독신당원으로 육성하고 있다고 한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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