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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대이동

등록 2008-12-25 18:12 수정 2020-05-03 04:25
한겨레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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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어디서 보내?” 12월이 시작되고 나서 학교에서 가장 많이 듣고, 또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다. 대답은 “독일에 있는 할머니에게 가” “맨체스터 집으로 가지” “친구 결혼식이 인도에서 있어. 가는 김에 여행도 하려고”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지” “우울하게도 기숙사에 있을 것 같아” 등. 이런 식의 ‘크리스마스용 대화’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다음 내년 1월 봄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내야 하는 5천 단어짜리 가을 학기 에세이 2개에 대한 푸념으로 끝난다.

나 역시 가을 학기 시작과 동시에 크리스마스 여행 계획에 돌입했다. 뭐든 일찍 예약할수록 싸다는 법칙에 따라 저가 항공부터 호텔까지 검색에 들어갔다. 결과는 흡족했다. 파리나 베를린 등은 두세 달 일찍 예약하면 왕복 비행기삯이 최소 10만원, 최대 20만원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찌 런던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며칠 밤을 투자해 ‘품질 대비 저렴한’ 유럽 여행 계획을 완성했다. 그렇게 12월을 맞았다. 에세이에 대한 공포가 현실로 다가오고 도서관에서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져나가듯 사라지는 책을 목격하면서, 잠시 크리스마스 여행의 ‘정당성’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과는, 못 먹어도 고!

런던에는 4개의 공항이 있다. 저가 항공을 타려면 국제선이 주로 내리는 히드로공항이 아닌 루턴, 스탠스테드, 개트윅 등 외곽 공항으로 가야 한다. 저가 항공 비행기삯은 싸고 런던 대중교통비는 살인적이어서 런던 외곽 공항까지 가는 교통비가 비행기삯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싸다. 비바람이 유독 심했던 출발 당일, 비행기 체크인 시간에 맞춰 목적지 스탠스테드 공항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그런데 잘 가던 기차가 이름 모를 기차역에 정차한 뒤 움직이지 않았다. 곧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런, 공항역으로 가는 기차 선로에 나무가 쓰러졌다면서 기차역 밖에 버스가 있으니 버스를 타라는 게 아닌가. 맞은편에 앉은 청년과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이 하필 오늘 일어나느냐”고 외치며 기차역 밖으로 나갔다. 기차역 앞에서 비를 맞으며 짐을 들고 버스를 타려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피난민 행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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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기다렸다. 시간은 흘러갔다. 1시간 안에 못 가면 크리스마스 여행이고 뭐고 비행기는 ‘그렇게 안녕’이었다. 그때 기차에서 맞은편에 앉았던 청년이 사람을 모아 택시를 타고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버스를 타면 1시간 반이 걸리는데, 택시를 타면 30분이면 간다는 얘기였다. 무조건 고! 또 다른 사람을 섭외해 합승을 했다. 그렇게 체크인 마감 시간 20분 전에 도착했다. 문제는 택시비였다. 기차역에서 공항까지 택시비는 60파운드. 내 몫은 3분의 1인 20파운드였다. 도중에 내린 기차삯 18파운드에 택시비 20파운드까지. 싼 비행기 탄다고 좋아했던 기대는 8만원에 육박하는 교통비로 와르르 무너졌다.

그래도 역시 여행이 좋…은가. 파운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유로의 살인적인 물가와 에세이 준비하겠다며 싸들고 온 무거운 책, 대략 런던과 비슷한 크리스마스 풍경. 게다가 런던은 지금 세금 인하로 인해 말 그대로 ‘쇼핑의 천국’이다. 이런, 나 런던으로 돌아갈래!

안인용 한겨레 ESC팀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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