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던 적이 있다. 미국 드라마 때문이었다. 민주당 대통령 제드 바틀렛(마틴 신)과 그 보좌관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의회에서의 법안 성립 과정, 백악관의 언론 응대 방식,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 선거와 로비 등 정치의 모든 이면을 놀라울 만큼 상세하게 그려낸 이 작품을 보며 나는 정치인들이 ‘일’을 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았고, 괜찮은 정치 드라마 하나쯤 꼭 쓰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다. 이제는 우리도 이나 처럼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권력 비사 같은 과거의 이야기만을 할 게 아니라 지금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정치적으로 어떤 해법을 통해 개선될 수 있는가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보여줘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참고할 인물이나 아이디어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었다. 지난 5월 미국산 쇠고기 청문회 당시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이 이계진 한나라당 의원에게 “우리 분수를 알아야죠! 지금 정치인들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알아들을 국민이 없고 얼마나 정치권을 불신하는데”라고 지적한 것은 슬프지만 정확한 현실 인식이다. 정치인이라는 존재가 ‘평소에는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지만 세비는 분수에 넘치게 많이 받으면서 국회에서는 졸거나 야한 여자 사진을 보다가 때 되면 목소리 높이고 싸움질이나 하는 인간들’로 인식된 것은 국민의 무식의 소치가 아니라 자업자득이다. 지금은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으로 인해 제작진들이 징계를 받아 잠시 중단됐지만, 지난 몇 년간 YTN 을 통해 드러난 정치인들의 ‘쌩얼’은 그리 매력적이지도 기특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최근 국정감사가 “의 노리개나 장시간 취재 속의 한 건 식의 전리품 노릇밖에 더 하나 하는 생각”에 수도 없이 절망했다고 했지만, 전 의원의 ‘불륜 논평’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실황 저질 개그에 국민도 수없이 절망했던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나라 국회의원도 ‘일’을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국정감사 기간 중 한국방송에 대한 감사 실시를 결정했던 감사원 회의록을 요청했다가 ‘열람’으로만 제한당하자 A4 용지 10페이지가 넘는 서류를 손으로 베껴 적어 나왔다. 2시간 동안 직원들과 승강이를 벌인 결과였다. 쌀 직불금 문제에 관해서도 이명박 정부 인수위 단계에서 논의됐던 내용의 자료가 열람만 허용되자 역시 손으로 베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대학교 리포트를 쓸 때나 있었을 법한 일이다. 국민의 세금을 쓰고 사는 국회의원들이 일을 하는 건 당연한데도, 그 상식적인 행동은 너무나 참신했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진짜 정치 드라마를 쓰게 된다면 넣을 장면 하나는 정해졌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복사가 금지된 서류를 밤새 필사하는 국회의원과 비서관들의 모습이다. 아, 하나 더 있다. 국정감사장에서 자신의 심기가 불편하다며 18금 욕설을 내뱉으신 장관님은 그 캐릭터 그대로 모시고 싶다. 심지어 그분은 전직 배우이시니 이 얼마나 완벽한 캐스팅인가!
최지은 〈매거진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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