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하면 한없이 쓸쓸해지는 것이다. 몹쓸 크리스마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은근히 필사적인 사람들이 된다. 이 특별한 날, ‘세상 모든 사람들’ 속에 무사히 섞여 최소한 ‘남들처럼’은 보내야 하지 않겠나. 그러다 보니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이날과 관련된 어떤 이상적인 이미지를 의식하면서 그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게 된다. 크리스마스의 역설이 그렇게 생겨난다. 평소보다 훨씬 더 행복해야 마땅한 날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흔히 겪는 어떤 사소한 불행 앞에서도 ‘오늘은 크리스마스인데!’라고 생각하면 더 서러워져서, 결국 우울한 날이 되어버리고 마는 역설.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문학들은 흔히 이 크리스마스의 역설에 초점을 맞추고 ‘너만 그런 게 아냐, 다 그래’ 하고 우리를 위로한다.
성탄절 기념으로 존 치버의 단편 ‘가난한 자들에게는 슬픈 날, 크리스마스’()와 김애란의 단편 ‘성탄특선’()을 다시 읽고 한 생각들이다. 그러고 보니 ‘성탄문학’이라는 장르가 있어도 좋겠다 싶다. 소설 쪽에는 마침 나보코프, 트루먼 커포티, 폴 오스터 등 쟁쟁한 작가들의 크리스마스 단편들을 모아놓은 (황금나침반)가 출간돼 있으니 읽어보시면 되겠다. 시 쪽에는 어떤 사례가 있을까. 올해 소월시문학상과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시인들의 수상시집 겸 신작 시집이 최근 출간됐다. 소월시문학상을 받은 정끝별의 시집 (창비)과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여태천의 시집 (민음사). 두 시집 모두에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시가 있어 읽어본다.
여태천 시인의 짧은 시. “두 손을 높이 들고/ 불안은 고드름처럼 자란다.// 당신은 맨발이었고/ 나는 유령처럼 당신을 안았다.// 굴뚝과 굴뚝처럼/ 우리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크리스마스’ 전문) 이런 유형의 시에서 제목은 본문만큼 중요하다. 제목이 갖고 있는 느낌과 본문에서 제시돼 있는 이미지 사이의 긴장이 이 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두 손을 높이 들어 트리를 장식하는 사람들 대신에 고드름처럼 아래로 자라는 ‘불안’이 있고, 선물이 들어 있는 양말 대신에 ‘맨발’로 서 있는 당신이 있고, 따뜻하게 포옹하는 혈육이 아니라 ‘유령’처럼 당신을 안는 ‘나’가 있고, 산타클로스의 어여쁜 입구인 굴뚝 대신에 ‘굴뚝’처럼 꽁꽁 얼어붙은 연인들이 있다. 앞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어떤 이상적인 이미지’에 대해 말했거니와, 이 시는 처연하고 간절한 어떤 연애의 풍경을 구축해 그 관습적인 성탄절의 이미지에 무채색을 덧칠한다. 다음은 정끝별의 시.
“고요한 밤의 오색 트리에 매달린 탄일종들이 일제히 울리고 또 울렸다 한들/ 거룩한 밤에 술 취해 주무시는 아버지 옆에서 새우깡을 먹으며 봤던 벤허를 또 봤었다 한들/ 어둠에 묻힌 밤에 루돌프 사슴을 불러대는 두 딸을 이끌고 홍대 앞 까페에 이렇게 이르렀다 한들// 선물꾸러미를 어깨에 멘 여드름투성이를 앞세우고 반백의 노신사가 들어섰고/ 부부가 열댓 살의 두 남매를 앞세우고 들어섰던가/ 두 남매의 입에서 할아버지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여드름투성이의 선물꾸러미를 두 남매가 메고 나갔던가/ 반백의 노신사는 자분자분 쩔쩔맸고/ 여드름투성이는 고개를 숙인 채 쑥스러워했고/ 남편은 멀찍이 거북해했고/ 아버님 도련님 하며 아내만이 부산스러웠던가.”(‘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에서)
1연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도입부 노랫말을 하나씩 건져올리고 ‘∼했다 한들’이라는 어미와 결합해 성탄절 분위기를 눅여버린다. 2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어느 가족의 어색한 만남을 “자분자분 쩔쩔맸고”나 “멀찍이 거북해했고” 등의 절묘한 부사 활용으로 재현한다.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이렇다. “호남에서는 연이은 폭설로 길이 막혔다는/ 이른 새벽 이웃은 망상리조트를 향해 출발했다는/ 제주에서는 사십대 아버지가 두 딸과 조촐한 성탄파티 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는/ 코가 석 자나 빠진 루돌프들이 이끌고 가는/ 세상 참, 떼꾼한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눈이 쑥 들어가고 생기가 없음’을 뜻하는 ‘떼꾼한’이라는 수식어를 크리스마스에 얹었다. 이 시의 리드미컬한 어조는 촌스럽고 생경하지 않은 방식으로 ‘떼꾼한 우리’를 위로한다.
크리스마스니 뭐니 떠들어도 어떠한 마음의 미동도 없이 의연하고 무심하게 하루를 넘길 줄 아는 훌륭한 이들에게는 이런 소설과 시조차도 괜한 법석처럼 보이겠다. 크리스마스라니, 참으로 빤한 수작들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빤한 것들은 언제나 이상한 마력이 있어서, 그것이 빤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빤함이 이상해, 정말 빤하다는 걸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확인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김애란, ‘성탄특선’) 그래서 어리석고 마음 약한 우리는 올해도 크리스마스 때문에 살짝 홍역을 치렀던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왜 하필 연말에 있어 마치 9회말 2사 만루 타석에 들어선 타자의 심정이 되게 하는 것인가 말이다. 그냥 이렇게 생각해버리자. 나만 병살타를 친 게 아니라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는 9회말 2사 만루 홈런만큼이나 드문 일이라고.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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