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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립화’는 불가능한가

등록 2003-02-12 00:00 수정 2020-05-02 04:23

다시 보는 유길준의 ‘중립화’론… 120년 전 통치자들의 어리석음을 반복 않기 위하여

‘반미’라는 엉뚱한 딱지가 붙은 미군 범죄, 불공평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조약, 부시의 극우정책에 대한 비판….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비미’(批美·미국에 대한 비판적 입장)가 이미 일상화된 오늘의 한국에서도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과격분자’나 ‘비주류’로 보인다. 북한이 이제 더 이상 ‘적화통일’을 꿈꾸지 않는다는 것이 불보듯 뻔하고, 한반도가 미국의 대중국 도발에 이용되어 한국 땅에서 일대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관변쪽 전문가들까지 제기하는 오늘날에 와서도 ‘미군 철수’는 아직 ‘색깔이 수상’한 입장으로 보일 수 있다. 더군다나 한-미 동맹의 전체적인 구조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이야기라면 틀림없이 극단주의자로 몰릴 것이다. 과연 미군이 늘 붙잡아야 할 ‘백년 손님’이고 한-미 안보조약은 무오류의 성경책일까

50·60년대의 ‘중립화 통일론’

사실 한국 공론의 장에서 한-미 안보관계가 성역화되고 한-미 동맹에 대한 일체의 수정론들이 다 ‘용공’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시대와 그 이후의 일이다. 한국 정치를 후퇴시킨 박정희가 대미 안보관계를 신성 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어 이 분야에 대한 현대적인 비판적 사고를 원천 봉쇄하기 이전에는 한-미 안보관계의 근본적 수정을 전제로 하는 ‘중립화 통일’과 같은 주장들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하는 ‘한반도 중립화론’을 처음 제기한 것은 1948년 미소공동위원회의 일부 참가자와 6·25 동란 이후의 국무장관 덜레스 등의 미군 관변쪽이었다. 동서 양 진영의 틈새에서 중립을 지키는 오스트리아나 핀란드 등을 한반도를 위한 모범으로 제시한 1950년대 미국의 ‘한반도 중립론자’들은, 일단 남한의 극우 반공 체제의 지원·유지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미국쪽 비용을 줄이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1950~70년대에 함께 ‘중립화’ 목소리를 높였던 재미·재일동포 학자·언론인의 논리는 폭력적인 분단 체제를 극복하고 평등한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정치 공론의 공기가 맑아진 4·19 의거 이후의 서울에서도 ‘세계 공산주의와 독점 자본주의의 폭력을 모두 제거하는 조국의 중립화 통일’은 대학교 시국토론회와 심포지엄의 인기 토픽이었다. 남북한 간 통신의 두절이 바로 인간 기본권 침해라는 사실도 많이 거론됐다. 국제 인권법의 논리를 생각해보면 50년 넘게 한반도의 반대쪽에서 사는 친척들과 한장의 편지도 주고받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이 그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남북 양쪽의 정권들을 국제 법정에 제소할 수 있는데, 분단 체제의 규율이 내면화된 우리가 감히 상상조차 못하는 대목이다.

2공 당시의 ‘비소비미(非蘇非美) 자주노선’과 ‘평화통일’의 기수는 혁신계의 대변지 였다. 5·16 이후 군부에 의한 야만적 유혈 숙청으로 혁신계가 몰락하고 나서 국내에서 ‘중립화 통일’을 이야기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반공, 즉 비이성적 친미와 무조건적 반북은 말 그대로 ‘제1국시’이자 일제의 장교 박정희가 한국 땅에서 재현한 신판 ‘제국’의 ‘국체’(國體)가 되고 말았다.

물론, 2공 시절 혁신계의 ‘중립화 통일’ 주장에는 다소 관념적 측면이 없지 않았다. 현재 같으면 어떤 형태의 통일도 남한 위주로 이루어질 것이 상황의 논리인데, 현재와 반대로 북한 경제가 우월했던 1960년대 초기에 과연 이북의 지도자들이 중립적 통일을 진행할 의사가 있었는지 의문을 가져볼 만하다. 어쨌든, 미국이 ‘혈맹 그 이상의 혈맹’이 돼버린 1961년 5월16일 이후의 한국에서는 ‘중립’ 주장이 곧 반국가 범죄쯤을 의미하게 됐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극우 체제하에서 학교마다 학생들이 근대 한국 ‘중립화’ 논리의 원조를 ‘우리나라 개화의 선각자’를 통해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다름 아닌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다.

유길준이 걱정한 러시아의 남하

1885년 12월, 조선 사상 최초의 도미 유학생 유길준은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자마자 정변 연루 혐의로 연금 조치를 당한다. 일본·미국 신문을 통해 그가 이해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적 상황은 그야말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으로 전통적 종주국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고 예속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성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민씨 척족 위주의 수구파는 철저하게 친중국적 성향을 지킨다. 또 한편으로는 기존의 동아시아 패권국가 청나라에 대한 도전세력으로서 연해주 경략에 큰 힘을 쓰는 러시아와 부국강병을 이루어가는 일본 등이 부상한다. 한반도가 동아시아에서의 헤게모니 싸움의 터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나라를 보존하는 묘책이 무엇일까 미국에서 국제법적 개념으로서의 ‘중립’에 대해 충분히 공부한 유길준은 한반도 중립화를 ‘보국(保國)의 묘안’으로 제시한다.

1885년 말께 그가 쓴 의 주요 문제의식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어떻게 막는가였다. 그는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극동지역의 두 신흥세력 중에서 러시아를 훨씬 더 큰 위협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공로의식’(恐露意識·러시아에 대한 무조건적 두려움)이야말로 일본의 당국자들이 중국·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열심히 주입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견해에 문제가 있다 해도 당시의 시무책(時務策)치고 그의 세계 대세론은 대단히 현실적이었다.

예컨대, 고종을 비롯한 당대의 수많은 정치 거물들이 미국을 ‘천하에 가장 공평한 나라’로 보고, 위급할 때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유길준은 그 기대들을 일축한다. 경제적 이득만 챙기려는 미국과 통상은 할 수 있지만 더 이상의 도움은 기대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그의 예측은, 미국의 필리핀 식민화에 대한 일본의 인정을 대가로 조선의 식민화를 ‘허락’해준 1905년에 그 정확성을 인정받았다. 유길준은 곧 다가올지 모를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지켜줄 세력은 미국이 아닌 기존의 종주국인 중국으로 보았다.

그러나 조선에 미리 중국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은 ‘긁어서 부스럼’ 격으로 침략 세력을 자극하는 부작용밖에 낳지 않을 실책이므로, 조선이나 중국으로서 가장 적절한 계책은 다름 아닌 조선의 영구 중립화라는 것이 유길준의 지론이었다. 즉 중국의 주도 아래 일본·러시아·영국·프랑스 등 조선에서 이권이 있는 당사자들이 회동하여 다같이 조선의 영구 중립을 조건으로 조선의 자주와 평화·안정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의 벨기에 등의 약소국처럼 조선이 침략으로부터 국제법적 보호를 얻는 동시에 중국은 형식상의 ‘속국’에 다른 열강이 쳐들어오지 않을 보장도 받으며, 다른 열강들도 여러 현실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패권국 틈에서 위험을 피하는 길

연금 중의 ‘불온 인물’ 유길준이 발표조차 하지 못한 그의 은 당시의 국내외 상황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중국과 민씨 척족의 집권세력들이 그대로 현실에 안주하는 반면, 고종의 일부 측근들은 러시아나 미국의 보호를 갈망하는 등 ‘중립’보다는 단순한 ‘대외의존’을 지향했다. 그러나 외세에 의존해봐야 침략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중국과 러시아가 일본으로부터 패배를 당한 뒤에야 분명해졌다.

120년 전에 한반도에서 중국이 누린 헤게모니를 지금 미국이 누리고 있다. 갑신정변 진압 이후에 군대를 철수한 중국과 달리 미국은 군대를 주둔시켜놓고 있다. 120년 전 기존의 헤게모니에 도전장을 던지는 세력이 러시아와 일본이었다면, 오늘날 그것은 중국이 되고 있다. 배역이 달라졌지만, 한반도가 여러 제국주의 세력들의 각축의 무대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은 그대로다. 기존 국제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도전세력을 자극할 수 있는 기존 패권국가 군대의 주둔을 피하고, 열강의 틈새에 놓여 있는 한반도를 중립화해 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 유길준과 1960년대 혁신계의 ‘중립화 통일’ 논리였다. 그 논리에 비현실적 요소가 있다 치더라도 일단 한반도의 진정한 자주·독립의 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그 아이디어가 적어도 다시 공론화될 가치는 있지 않을까 유길준의 생각을 무시해버린 120년 전 통치자들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

박노자 ㅣ 오슬로국립대 교수· 편집위원


1. 강만길, ‘유길준의 한반도 중립화론’(, 창작과비평사, 1979, 102~117쪽)
2. 김봉렬, (경남대학교출판부, 1998, 317~323쪽)
3. (허동현 번역, 일조각, 1989, 의 유일한 한글 번역 수록)
4. 유영익, ‘갑오경장 이전의 유길준 -1894년 친일 개혁파로서의 등장 배경을 중심으로-’(, 제4집, 1986)
5. 이광린, ‘미국 유학 시절의 유길준’(, 196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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