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대법관이 될 뻔한 ‘관계자’

등록 2012-08-03 14:51 수정 2020-05-02 04:26
한겨레 신소영 기자

한겨레 신소영 기자

기자가 된 뒤, 엄마 친구 아들 말고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 그 녀석, 일단 언론 플레이의 달인이다. 중요한 이슈가 터졌을 때 진보·보수 언론 가리지 않고 언제든 기자와 만난다. 둘째, 사내 정치의 달인이다. 그 녀석의 소속과 직급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 입법·사법·행정부 가운데 하나거나 전부 다다. 그런데 입법·사법·행정부의 모든 중요한 이슈와 관련해 비하인드를 안다. 그러니까 ‘관계자’는 한국 기자들에게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다. 여기서 잠깐. 지난 7월11일 국회 대법관 인사청문회 한 장면.

최재천 민주통합당 의원(이하 최): 저희는 간혹 ‘청와대 최고위 관계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BH’(블루하우스·청와대)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검찰에도 그런 관행이 있습니까? …김병화라는 이름이 수사에 언급이 되면 ‘의정부지검 고위 관계자’라고 부르는 관행이 있습니까? 예규가 있습니까?

김병화 전 인천지검장(이하 김): 없습니다.

최: 그러면 ‘알고 지내는 검찰 관계자’라는 식으로 공소장에 적는 관행이 있습니까?

김: 그런 관행도….

최: 없습니까? 그러면 지금 박영헌에 대한 공소장에, 분명히 후보자님이 분명한데, ‘알고 지내는 검찰 관계자’라고 썼단 말입니다. 이런 공소장은 잘 된 공소장입니까, 못 된 공소장입니까?

김: 그건 제가 평가하기가….

김병화(57·전 인천지검장) 대법관 후보자가 7월26일 자진 사퇴했다. 김 후보자는 최근 퇴임한 검찰 출신 안대희 대법관의 후임으로 추천됐다. 이른바 검찰 몫 자리다. 온갖 의혹이 나왔다. 제일저축은행 브로커 박영헌(61)씨와의 관계가 결정적이었다. 김 후보자는 지난해 저축은행 수사 당시 박씨와 수십 차례 통화했다. ‘형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단순한 통화였다’고 법조인 김 후보자는 생각할 게다. ‘법대로’ 좋아하시는 법조인들이 법에도 없는 검찰 몫 대법관 만들기에 땀 흘리다 시트콤 한 컷 찍었다.

‘관계자’는 기자들의 마약이다. 기자는 취재원에게 익명을 보장하고 편하게 코멘트를 받는다. 독자가 발언의 신뢰도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 제시를 포기한 대가다. 때로 익명이 용기 있는 발언을 이끌어내지만, 익명 보도 관행은 종종 취재원의 언론 플레이에 악용된다. 뻔한 대변인 코멘트도 ‘~관계자’라고 보도하는 건 남용이다. 원칙은 기명이다. 는 몇 년 전 발표한 ‘취재보도준칙’에서 익명 인용을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쉽지는 않다. 한국 언론만 그런 건 아니다. 영미 저널리즘에서도 쓴다. 대중지는 우리나라의 관계자처럼 ‘어떤 소스’(a source)라는 단어를 쓴다. 좀더 지각 있는 언론은 ‘내부자’(insider)나 ‘익명을 요구한 아무개’(~who demands anonymity)라고 표현한다.

언론도 경계하는 관계자라는 용어를 버젓이 검사가 공소장에 사용하는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 그 이상한 나라에서 관계자가 대법관이 될 뻔했다. 관계자는 그냥 언론의 (한때의) 축복으로만 남으시라.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