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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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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단협의 추억

등록 2005-11-09 00:00 수정 2020-05-03 04:24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10·26 재선거 참패 뒤 열린우리당의 일부 의원들이 ‘노무현 대통령 책임론’을 제기하자 김두관 전 행자부 장관 등 친노 인사들은 ‘후단협 망령 부활’을 경계했다. 2002년 대선에서 각인된 ‘후단협=배신자’라는 학습효과를 헤집는 정서적 반격인 셈이다.
김원길, 김영배, 박상규, 김기재, 최명헌, 이윤수, 유용태, 설송웅, 김경천, 김덕배 등 34명의 민주당 의원들이 대선이 임박한 2002년 10월4일 결성한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는 한국 정치사에 잊지 못할 추억을 제공했다. 이들은 ‘수구냉전 세력인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집권 저지’를 대의명분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방법이 엽기적이었다. 국민경선을 통해 뽑힌 민주당 후보 노무현을 끌어내리고 무소속 정몽준 의원으로 후보 교체를 시도한 것이다.
물론 이들은 ‘제2의 이인제식 경선 불복’이라는 비판을 우려해 처음에는 노 후보 사퇴를 내놓고 외치지 못했다. 하지만 노 후보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정 의원의 몸값이 상한가를 치자 금도를 넘어 오버했다. 노 후보를 압박하는 수준을 넘어 정몽준 옹립의 공을 선점하려는 경쟁에까지 뛰어든 것이다. 국민경선 관리위원장으로 “공정한 국민적 축제”라고 자화자찬했던 김영배 의원은 “국민경선은 사기극”이라고 폭탄발언을 했다. 결국 김원길·김영배 의원 등 14명은 민주당을 탈당해 김종필 총재 중심의 자민련, 이한동 전 총리의 하나로국민연합까지 묶는 ‘반이회창·반노무현 4자 연대’를 공식화하며 “정몽준 의원으로 단일화에만 승복하겠다”고 외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몽준 의원은 민주당 차원에서 자신을 공식 후보로 옹립하는 ‘털도 안 뽑고 찜쪄먹는’ 방식을 원했고, 자민련과 하나로국민연합은 정몽준 옹립을 전제한 4자 연대 반대로 돌아서며 후단협은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보인 후단협의 행태는 정치권의 영원한 술안주감이다. 고급 음식점을 돌던 모임이 식사비 분담 문제로 국회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모인 일, 결실 없는 모임에 “누가 배신할지 몰라 매일 서로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자조하던 모습 등….
그러나 후단협 사태의 백미는 여론조사를 통해 노 후보로 단일화된 뒤 벌어진 억측과 배신, 생존 투쟁이다. 김영배 의원 등 민주당에 복당한 12명은 노 후보의 지지율 회복 1등 공신은 비난을 무릅쓰고 단일화를 외친 자신들이라고 억지 논리를 펼쳤다. 뒤늦게 대통령 선거전을 돕겠다며 1천만원씩 특별당비까지 낸 것으로 알려졌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동료들과 약속한 것보다 몇 배나 많은 특별당비를 낸 것으로 전해지면서 “저만 살려고 치사하게 처신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김원길, 박상규 두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도 빠질 수 없는 추억거리다. 김원길 의원은 후단협 좌장으로 기자들에게 “어떻게 이룬 평화적 정권교체인데 독재세력인 한나라당에게 줄 수 있냐”며 눈물까지 글썽이며 후단협의 순수성을 강변해왔다. 그러나 노무현으로 단일화가 이뤄지자 대선을 20여 일 앞둔 11월26일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보다 더 안정돼 있다”며 한나라당으로 날아갔다. 그 이유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다만 노 대통령의 몇몇 측근들은 “당시 김 의원이 노 후보 쪽에 선거자금 조달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며 자신이 주역을 맡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거절당하자 자존심이 상해 떠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편, 김원길 의원을 오래 모셨던 윤후덕 보좌관과 최종환 비서관은 의원의 잘못된 선택을 따를 수 없다며 짐을 싸 신선한 충격을 줬다. 이들은 지금 청와대 요직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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