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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기적

36살 이용훈의 퍼펙트한 부활
등록 2012-07-05 13:52 수정 2020-05-03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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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4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LG의 경기. 8회까지 롯데 자이언츠가 3-0으로 앞서고 있지만 승패와 무관하게 야구장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관중, 선수, 기자, 중계단들 모두 입방정이 될까봐 말을 아꼈지만, 그 야구장 안에 있는 3만 명 모두 가시권에 들어온 기적 앞에서 요동치는 심장을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30년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1군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없던, 단 한 명의 주자에게도 출루를 허락하지 않은 채 27명의 타자를 연속으로 잡아버리는 퍼펙트게임. 롯데의 이용훈은 8회말 원아웃, 22명까지를 잡아낸 상태였습니다. 이미 그는 지난해 9월 2군 무대에서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퍼펙트게임을 해낸 선수라, 관중석은 신의 두 번째 선물에 대한 기대로 불타올랐습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용훈은 23번째 타자 최동수에게 안타를 허용했습니다. 중계진은 탄식했고, 관중석에서는 비명이 터졌으며, 제 옆을 뚫고 나간 타구에 유격수 정훈은 기적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모두가 설레며, 모두가 지켜주려 했던 기적은 이렇게 23번째 승부 만에 무산됐습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던 그 기적을 모두가 지키려 한 이유는,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오랫동안 ‘새가슴’으로 불리며 퇴물로 취급받던, 36살의 노장 투수가 도전한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이용훈은 사연이 많은 선수입니다. 입단하자마자 삼성과 SK를 오가다 고향팀 롯데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젊은 이용훈은 리그 최고 수준의 직구를 가진 선수였습니다. 강속구를 앞세워 2005년에는 리그 탈삼진 3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06년 어깨 수술을 받은 뒤 강속구는 사라졌고, 이용훈은 변화구와 제구력으로 승부하는 투수로 변신했습니다. 하지만 위력이 떨어진 30대 중반 노장 투수의 공은 난타를 당했으며, 그는 새가슴이라는 조롱 속에 팬들에게서 잊혀졌습니다. 지난 2년간 1군 경기에서 이용훈은 승리가 없습니다.

지난해 9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직도 야구하나?” 싶던 이용훈이 비록 2군 경기였지만 한국 야구 사상 최초의 퍼펙트게임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팬들은 2군 경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어떤 신기함 외에, 잊혀진 투수 이용훈에게 일어나고 있던 부활을 눈치채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용훈은 2012년, 36살의 나이에 다시 1군의 5선발 투수가 됐고, 6월27일 현재 7승으로 팀을 이끄는 최다승 투수가 됐습니다. 모두 잊고 살았던 노장 투수가, 몇 번이고 은퇴를 고민했을 선수가, 새파란 20살 후배들과 2군에서 피땀 흘리며 남몰래 인생의 마지막 승부를 준비해왔을 인고의 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야구는 선수 생명이 긴 운동 중 하나이며, 마흔의 연륜으로 20대의 육체를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스포츠입니다. 수없이 무너지고 무참히 버려져도, 몇 년이 지나 기어이 돌아오는 선수들의 모습에는 어떤 숭고함마저 느끼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용훈이 따낸 시즌 최다 승수는 2001년 신인 시절 기록한 9승입니다. 11년이 지난 지금, 모두가 “끝났다”며 등 돌려버린 서른여섯의 퇴물 투수 이용훈이, 거침없는 돌직구로 세상에 두려울 게 없던 스물다섯의 이용훈을 넘어서려 합니다. 이미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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