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한 선수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6년 전, 회사에서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생의 총체적인 슬럼프가 찾아온 시기, 휴가를 내고 후배와 함께 목적지도 없이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인생은 너무 많이 진행돼버렸고, 지금 하는 일에서 승부를 보기엔 자신이 없었습니다. 여행을 다니며 발 닿는 곳마다 주저앉아 소주를 털어넣었습니다.
때는 여름이었고, 날마다 기상관측 이후 최고기온을 찍어대던 시절이었습니다. 정처 없이 흐르던 중 동해안의 한적한 횟집에 발이 닿았습니다. 가게에서 켜놓은 TV에선 프로야구 2군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습니다. 관중이 없는 경기장엔 더그아웃에서 지르는 후보들의 함성이 고스란히 중계방송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저 TV 화면 속의 사내들 중 과연 몇 명이나 1군 선수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선수의 처지에 심하게 감정이입이 돼버렸습니다. 이 팍팍한 세상은 모두에게 바늘구멍만큼의 희망만 남겨준 것 같았습니다.
유난히 선수 한 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야구선수라기엔 조금 어색한 동그란 안경을 쓰고, TV 중계가 된다는 걸 몰랐는지 얼굴엔 선크림으로 그야말로 ‘떡칠’을 하고 나오는 바람에, 화면에 비친 모습은 마치 가부키 화장을 한 것처럼 우스꽝스러웠습니다. 그는 2군 선수다운 헛스윙으로 삼진을 당했습니다. 뜨거운 여름, 어디인지도 모르는 동해안의 사람 없는 횟집에서, 관중이라고는 매미뿐인 2군 경기가 TV로 중계되고 있고, 도대체 미래라고는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선수가 선크림으로 가부키 화장을 한 채 삼진을 당하는 모습을 보던 그 순간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지난 5월, 나른하게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보고 있던 중 저는 TV 화면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대타로 나와 스리런 홈런을 치며 상기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도는 한 선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넥센 히어로즈의 오윤. 그 안경과 독특한 이름, 제가 그를 잊을 리 없습니다. 6년 전 어느 쓸쓸한 바닷가의 횟집 TV로 중계된 2군 경기에서, 미래라고는 없어 보이는 스윙을 하고 있던 그 선수가, 6년이 지난 지금 당당히 1군 경기에서 홈런을 날린 것입니다.
황급히 오윤의 경기 기록을 검색해보았습니다. 1981년생이니 벌써 우리 나이로 서른둘입니다만, 나이 서른 정도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 올라와 대타 인생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통산타율은 2할이 살짝 넘습니다. 유명한 선수가 아니라 그런지 관련 기사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6년 전의 그 2군 선수가 서른둘이 된 아직까지 살아남아 입단 13년차의 1군 후보 선수가 되어 꿈을 향해 끈질기고 선명하게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저에겐 말할 수 없이 감격적이었습니다. 6년 전의 무너졌던 저도, 그 황량한 바닷가 횟집에서 마주친 2군 선수도, 어쨌든 6년이 지난 지금 모두 살아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결국 성공하진 못하더라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펼쳐온 승부에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슈퍼스타들은 우리에게 드라마를 보여주지만 승률 2할의 인생을 살아온 오윤의 한 타석은 저에게 인생을 보여줍니다. 오윤도 저도, 오래오래 이 승부를 이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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