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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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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소중한 사소한 약속

좋은 친구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시작한 사랑, 2만km를 건너 만난 민지와 제우디엘
등록 2012-07-05 13:40 수정 2020-05-03 04:26
민지와 제우디엘은 1만2천km 떨어진 도시에서 태어나, 둘이 합쳐 2만km를 날아간 도시에서 만났다. 멕시코에서 살기를 결정한 그들은 촘촘한 계획을 세우며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민지와 제우디엘 제공

민지와 제우디엘은 1만2천km 떨어진 도시에서 태어나, 둘이 합쳐 2만km를 날아간 도시에서 만났다. 멕시코에서 살기를 결정한 그들은 촘촘한 계획을 세우며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민지와 제우디엘 제공

“저희는 만남 자체가 위기였지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던 원동력은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노력, 그로 인해 탄생되는 진정한 믿음이었답니다.”

지구 반대편에 살며 화상으로만 볼 수 있는 연인과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한 모험일지 모른다. 민지와 제우디엘은 대략 1만2100km 떨어진 대륙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뒤 고향에서 각각 7721km와 1만2700km 떨어진 남반구의 한 해안도시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잠깐의 연애 기간을 거쳐 원래의 생활 터전으로 돌아갔고, 냄새를 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연인의 얼굴을 바라만 보며 끝없이 눈물만 쏟았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멕시코의 한 작은 도시 톨루카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4개월 전, 민지는 서울을 떠나 멕시코로 날아갔다. 전공인 건축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스페인어도 배울 요량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애간장을 태우며 사랑을 키워온 그녀의 남자, 제우디엘이 있었다. 어학연수를 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친구의 친구였던 그를 만났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더없이 착한 그와 곧 좋은 친구가 되었는데 어느 날 그가 뜻밖의 선언을 했다.

“내 여자친구가 되어주겠니?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우린 친구로서도 만나기 힘들 것 같아.”

특별한 감정을 가져본 적은 없었지만 막상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좋은 친구를 놓치고 싶지 않아 시작한 사랑이었는데 마음을 열고 나니 커다란 벽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어학연수 일정이 끝나고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는 민지에게 제우디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6개월 안에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민지는 그것이 고마웠지만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열심히 돈을 모아 서울을 찾았고 그녀의 친구, 친지들과 만남을 가졌다. 약속을 지킨 그에게 민지는 그가 멕시코로 돌아가면 꼭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수없이 많은 화상 채팅을 하며 흘려보낸 날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도 밤낮으로 아르바이트한 돈을 모아 멕시코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 번씩 서로의 마음을 굳게 확인한 두 사람은 진지하게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출판사에서 마케팅을 책임지는 제우디엘과 건축학도인 민지가 각자의 일을 이어나가며 함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얼까. 아직 20대인 그들이 경제적 면에서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삶의 기반을 다지려면 어떤 나라에서 사는 것이 유리할까. 아무래도 서울보다는 멕시코의 작은 도시가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여전히 인터넷상에서 애틋한 대화를 이어가야 했지만 전과는 달랐다. 그사이 두 사람이 쌓아온 신뢰의 탑은 높고 단단했고, 그것은 곧 확신에 가득 찬 미래를 의미했다.

멕시코는 가족을 중시하는 문화, 다소 남성중심적 사회라는 점, 눈물을 쏙 뺄 만큼 매운 음식까지 한국과 닮은 점이 많아 마치 잃어버린 쌍둥이 형제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 들게 하는 나라다. 낯선 문화에서 온 사람을 연인으로 맞는 것이 어색하고 어려운 일인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다행히도 민지와 제우디엘의 가족은 무한한 너그러움을 베풀어주셨다. 젊고 건강한 두 사람이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다면 인생에서 큰 힘이 될 것이라며 격려해주시는 양가 부모님 덕분에 지금 그들은 조심스레 새로운 사랑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톨루카는 좀처럼 아시아인을 찾아보기 힘든 도시다. 그렇지만 민지는 두려움 대신 열정으로 처음 접하는 모든 것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다. 제우디엘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민지를 절대 혼자 두지 않는다. 약 1년 뒤에 할 결혼을 위해 둘은 촘촘한 계획을 세워 돈도 모으고 여러가지 청사진을 그려가며 준비를 한다. 김치는 못 먹지만 김치찌개는 좋아하는 제우디엘과 테킬라는 싫어해도 ‘칼도 데 카마론’(멕시코식 매운탕)은 맛있다는 민지. 수천km의 바다로 가로막힌 장벽을 뛰어넘어 사랑을 이뤄낸 커플은 같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사소한 약속이 얼마나 감사하고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매일같이 함께 잠을 자고 언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연인 혹은 부부는 당연하다 여길지 모를 그것을 말이다.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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