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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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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비루하거나 숭고한

등록 2012-04-13 16:44 수정 2020-05-03 04:26

토요일 아침이다. 대개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시간이지만, 서둘러 서울역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출마한 배우 출신의 후보에게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와 깊은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나, 영화계에서 이런저런 법률 자문을 하며 아는 처지였다. 10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친소 관계로 보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그가 뜻밖에 장례식장을 찾아왔던 고마운 기억도 남아 있었다. 유명인이 왔다고 친척들이 지나치게 흥분하는 바람에 애도의 분위기에 차질을 빚기는 했지만 말이다.

혜택보단 불이익 감수하던 그

부산역에 내려서 갈비탕을 먹은 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센텀시티에 숙소를 정했다. 나는 후보가 저녁 7시께 유세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해 질 무렵 그곳으로 향했다. 센텀시티역에서 유세장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야 했다. 졸다가 눈을 떠보니 지하철은 ‘미남역’을 지나고 있었다. ‘역 이름이 좀 그렇다’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 역의 지상에 있다는 성형외과의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절묘하다.

유세는 지역의 롯데마트 주차장에서 열렸다. 내가 주차장, 아니 유세장에 도착했을 때 그의 영원한 동지 명계남씨가 사회를 보느라 확성기를 잡고 있었다. 국회의원 출마자의 선거 유세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시대라는 것은 알았지만, 5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니 마음이 쓰라렸다.

곧 후보가 도착했다. 나는 그가 유권자에게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주민들의 욕망에 호소하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진부한 약속을 들을까 두려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세차의 대형 화면에는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울린 그의 명연설이 비쳤다. 그때 나 또한 사무실에서 그 연설을 인터넷으로 보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아득하다. 유세장 앞쪽에 서 있던 어느 여성 유권자의 눈에 눈물이 어리기 시작할 때, 후보는 연설이라기보다는 대화에 가깝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담담하게 자신이 이해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은 뜻’과 자신이 이 지역에 출마한 이유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게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밝혔다. 그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보다는 솔직하게 진심을 전달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참여정부를 출범시킨 일등 공신이면서 혜택을 받기는커녕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고, 도리어 여러 불이익을 감수했던 그의 당연한 선택일지 몰랐다. 그는 연설을 마치고 나서 촬영을 원하는 유권자와 사진을 찍은 뒤, 보도블록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나도 사랑하던 동지를 떠나보내고, 다시 척박해진 이 땅에서 맨손으로 싸우는 그들이 안쓰러워 주차장 구석으로 가서 담배를 피웠다.

역사, 사랑, 기억의 다른 이름

나는 후보에게 인사를 하고 유세장을 빠져나와 근처 식당에 갔다. 식당 밖 아파트 위로 달이 떠오르고, 요사이 부쩍 달을 따라다니는 샛별도 빛을 던진다. 혼자 순두부를 퍼먹는데,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을 메운다. 정치는 비루하면서도 숭고한 것인가 보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 정치는, 역사나 사랑이나 기억의 다른 이름이며, 온갖 모멸과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사라진 동지의 뜻과 열망을 끝내 저버리지 않는 것인가 보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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