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처럼 중국·브라질 펀드에 가입한 것도 아니고, 대출받아 산 아파트 값 떨어질 일도 없는 나도, 요즈음은 경제위기의 무게에 눌려 지낸다. 다른 걱정이라도 하면 누가 “지금 이 판국에?”라는 핀잔이라도 할 것 같다. 경제 이론은커녕 신문 경제면의 뭐라뭐라 지수 같은 것도 잘 안 보니,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나 ‘자본시장 통합’을 논할 능력도 안 된다. 그렇지만 노동 사건을 주로 다루는 법률사무소를 하고 있는지라, 나름대로 위기의 기운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공공부문 통폐합이나 민영화, 금융기관들의 긴축으로 인해 구조조정이 임박한 노동자들의 불안 상담.
“6개 연구기관을 하나로 통폐합한다는데,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유리한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나요?” “구조조정을 전제로 이런저런 식으로 평가를 한다 하고 내가 거기에 해당되는 것 같아요.” “부양 의무가 적은 사람을 정리해고 대상자로 고른다는데 맞벌이 여자가 1순위래요. 그냥 나가야 할까요?” “회사가 어려우면 비정규직부터 자른다는데 이건 법에 위반되는 것은 아닌가요?”
심상치 않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 숱한 구조조정 사건 벼락을 맞았던, 내 변호사 1년차 때의 암울한 기억도 떠오른다. 서울 서초동 구멍가게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으니, 정말 사회 곳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
혹자는 위기의 원인이 밖에 있고, 우리는 IMF 위기 때 배운 것이 많아서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혹자는 이 위기가 물 건너왔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우울해한다. 하지만 무식해서 용감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배가 비바람은 막을 수 없지만 비바람도 언젠가 멈추듯, 이 물 건너온 위기도 어느 때이건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비바람이 지나간 뒤 그 배가 어떤 모습일지는, 우리의 대처법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올수록 혹시 물이 스며들 곳은 없는지, 지금까지 배를 잘못 다뤄온 것은 아닌지 제대로 살펴야 한다. 선장이나 항해사가 배를 잘못 조정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겨 바로잡아야 한다. 배 안이 혼란한 틈을 타 승객의 금고를 터는 도둑처럼, “경제가 이 모양인데!”라는 엄살 속에 ‘인권’과 ‘복지’ 같은 가치 위에 ‘통제’나 ‘무한경쟁’이 설 수 없게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이미 배에 큰 구멍을 만들어놓은 얼치기 선원들이 금산분리 원칙 같은 것을 허물자고 하는 어설픈 술수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할 일이 더 많다.
그렇지만 다른 무엇보다 물러서지 않아야 할 것- 비바람이 지난 뒤 우리 배가 아무리 멀쩡해도, 승객과 선원들이 모두 건강하고 무사히 남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 우리가 IMF의 긴 터널을 헤치며 배운 것이 고작 배가 흔들린다고 선원과 승객을 다 던져버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구조조정’이나 ‘효율성’ 또는 ‘합리화’라는 말, 그 속에 ‘사람’이 있음을 먼저 생각하고, 특히 취약한 승객들이 배에서 떨어지지 않는지 계속 살펴야 한다. 금융의 위기가 실물로, 그 실물경제의 어려움을 직접 노동시장으로 가져와 일자리를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렸을 때, 가계의 구매력이 떨어져 내수 경기를 더 가라앉히는 악순환, 그리고 그 엄혹한 결과를, 우리는 이미 충분히 학습했으니까.
정리해고 많으면 ‘특수’라고요?하지만 일자리 증가율이 계속 떨어져 7개월 연속 정부 목표치에 미달하고, 상대적으로 저학력·저소득층 실업이 심화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고 보니, 불길하다. ‘구조조정 특수’라든가, 정리해고가 많아야 노동 변호사가 돈을 많이 버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리해고 사건 하나도 안 맡아도 좋으니 제발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라는 노래가 있다. 그는 자본·세계·정의·개발이란 이름의 세련된 폭력 뒤에 가려진 ‘사람’이 있다고 했다. 2008년 청명한 가을날, 덜컥 물 건너온 위기에 맞닥뜨린 우리는, 경제를 살리자는 구조조정의 구호 아래 있는 것 또한 ‘사람이었네’- 되뇌어볼 때다.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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