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바이오시스템학과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내가 사는 세상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건너다니던 지하도, 급하게 올라타기만 하면 됐던 버스, 별 불편 없이 구경하던 백화점. 지극히 평범하기만 하던 이 모든 것들이 유모차를 앞세운 뒤부터 갑자기 ‘심각한 장애물’로 다가왔다.
유모차를 끌고 거리를 나섰을 때
유모차를 앞세운 부모들은 매일 웬수(?)를- 외나무다리가 아닌- 계단에서 만난다. 두 살 된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가까운 백화점에 나들이 한번 나가려 해도,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유모차를 밀면서 도심을 돌아다니려면 부모는 거의 유모차를 ‘들고’ 다녀야 할 신세가 된다. 엄마에게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을 한번 탄다’는 것은 그 자체로 3.5km 마라톤의 각오가 필요하다.
도대체 서울에 지하도와 육교가 왜 그렇게 많은지, 버스 문턱은 왜 그렇게 높은지, 지하철을 타려면 왜 그렇게 많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만 하는지, 계단 하나 문턱 하나가 불편이고 짜증이고 분노다. 장애인이동권연대에 4년째 매달 후원금을 보내고 있지만, 장애인들의 이동권이 얼마나 심각한 사회적 문제인지를 이 철없는 인간은 내 아이를 낳고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덧붙여, 아빠가 유모차를 끌고 도심에 나선다는 것은 대한민국 사회에선 그 자체로 금기가 된 모양이다. 도심 어디에도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줄 곳도, 우유를 먹일 곳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기저귀를 갈 수 있는 받침대가 설치된 곳은 거의 없거나 간혹 있다 해도 여성 화장실에만 있고, 우유나 모유를 먹일 수 있는 유아휴게실은 남성이 들어가기엔 좀 민망한 공간으로 디자인돼 있다. 구성원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조차 소홀히 하는 나라에서 아이를 덜컥 낳으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출생률은 한동안 크게 오르기 힘들 것이다.
유모차를 탄 아이가 세상을 돌아다니기에 불편하다면, 기력이 쇠한 어르신들이 돌아다니기에도 세상은 불편할 것이다. 그들에게도 계단과 지하철과 버스는 그 자체로 장애물이자 폭력일 것이다. 몇 해 전엔가 미국의 유명 대중잡지에 고대 이집트 시대에 살고 있는 한 노인이 벽에 낙서를 하는 만화가 실린 적이 있다. “요즘 계단은 진짜 엉망이다! 계단과 계단 사이에 모래를 많이 넣어 평편하게 만들어라”라고 긴 계단의 맨 아래 끝 벽에 낙서를 하는 장면이었다. 계단의 역사는 곧 인류 문명의 역사라고 할 만큼 오래된 것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노인과 아이들에게 계단은 늘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이 만화는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때는 그저 썰렁한 만화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심오한 만화였던 것 같다.)
서비스가 아니라 의무인 이유
2001년부터 장애인들은 ‘이동할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는 당연한 사실을 외치면서 지하철 승강기 설치, 저상버스 도입 등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지하철에 승강기가 설치돼 있고, 서울시내에는 저상버스도 40여 대가 다닌다고 들었다. 하지만 장애인들에게 여전히 세상의 문턱은 높기만 하다.
도시의 문턱을 낮추고 계단과 함께 경사로를 설치해야 하는 것은 비단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유모차를 태운 부모들, 노인들, 임신한 임산부들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경사로 설치나 저상버스 도입은 ‘사회적 소수를 위한 배려’나 ‘경제가 제 궤도로 올라가야 할 수 있는 배부른 서비스’가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위한 최소한의 의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아이라는 사회적 약자로 태어나 노인이라는 사회적 약자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사회적 약자 혹은 사회적 소수’로(숫자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내기 때문이다.
문득 바라본 복잡한 서울의 풍경에서 ‘거대한 허들’이 되어버린 도시의 폭력을 느낀다.
**정재승씨의 노땡큐는 이번호로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하신 필자와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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