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언론 에서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운영위원·이종태 기자(이하 장 교수 등)와 개혁진보 경제학자 간에 ‘한국경제 성격논쟁’이 시작됐다. 장 교수 등이 지난 3월 말 펴낸 신간 에 대해 개혁진보 학계의 이병천 강원대 교수와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이 글을 쓰자, 장 교수 등이 반박하고 이 교수가 재반박하는 형식으로 진행 중이다. 이번 논쟁은 19대 국회 개원 이후 정치권과 재계에서 경제민주화 이슈가 재점화하고, 개혁진보 진영이 재벌체제 이후 새로운 대안 제시를 요구받는 시점과 맞물려 더욱 주목된다.
‘이건희와 삼성도 구별 못하나’ 격한 논쟁하지만 논쟁의 분위기는 그리 밝지 않다. 오히려 감정싸움 조짐이 보인다는 우려도 있다. 장 교수 등은 첫째 반론인 ‘이건희와 삼성그룹도 구별 못하나’에서 “우리들에게 박정희주의자, 재벌옹호론자라는 욕설이 사방에서 빗발친다”며 “격렬한 욕설과 비난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첫째 재반박문인 ‘이건희와 삼성그룹을 생이별시키지 마라’에서 “내 쪽이 오히려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장 교수 등은 에서 경제민주화를 주장해온 개혁진보 학자들을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맹공했다. 이에 대해 개혁진보 쪽은 “참여정부의 개혁 실패를 재벌과 시장독재에 투항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사람들을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하니 어이가 없다”며 흥분했다. 장 교수는 지난 5월 이에 관해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사실상 사과했다. 결국 양쪽 사이에는 소통 부족으로 인한 오해가 적지 않은 듯하다.
생각이 다를 때는 논쟁이 격해지기도 한다. 재벌 개혁을 둘러싼 양쪽의 이견은 확연하다. 개혁진보 학자들은 “재벌 개혁이 경제민주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새누리당의 이혜훈 최고위원이 지난 6월5일 당내 모임에서 “재벌 개혁 없이 경제민주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과 비슷한 취지다. 반면 ‘재벌 타협론’을 주장하는 장 교수 등은 둘째 반론인 ‘재벌 개혁 만능론은 반민주적 행위’에서 “(우리는) 재벌 개혁이 제대로 돼야 그 이후 비로소 복지국가가 그 바탕 위에 제대로 구축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 말의 의도는 다음에서 더 분명해진다. 장 교수 등은 “출자총액제한제 강화를 통해 재벌을 약화 또는 해체시키게 되면 주주자본주의 영향력이 증폭되고, 친노동·친중소기업적인 정책과 복지정책을 발전시키는 것이 어려워진다”며 “재벌 개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복지국가 구축이라는 더 큰 목적에 복무하는 여러 수단 중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재벌 개혁만 놓고 보면 양쪽이 함께하기 힘든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 바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헌법 119조 2항은 균형성장, 소득분배, 경제력과 시장지배력의 남용 억제 등 경제민주화를 위해 정부가 시장을 규제해야 한다고 돼 있다. 경제민주화론자와 반경제민주화론자의 가장 쉬운 구분법은 바로 이 부분이다. 경제민주화를 위한 정부의 시장(재벌) 규제에 찬성하느냐 여부다. 이런 점에서 장 교수 등이나 개혁진보 학계는 모두 정부의 시장규제 찬성론자다. 반면 재벌과 보수 경제학자는 정부가 함부로 시장개입(규제)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맞선다.
복지국가 강조, 공통점 더 커
둘 사이의 또 다른 공통점은 복지국가 강조다. 재벌과 보수 경제학자들은 ‘선 성장-후 복지(내지 후 분배)’를 주장한다. 하지만 개혁진보 학자와 장 교수 등은 성장과 복지가 분리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민주통합당의 4·11 총선 공약을 디자인한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는 개혁의 양날개”라고 강조해왔다. 장 교수 등은 “재벌 개혁은 복지국가라는 더 큰 프레임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부분”이라며 오히려 복지를 더 상위 개념으로 둔다.
장 교수 등은 두 번째 반박인 ‘재벌 개혁 만능론은 반민주적 행위’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태인·이병천 등을 포함하는 많은 개혁진보 지식인들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경제민주화이고 그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 개혁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각에 따르면, 재벌 개혁의 핵심 과제는 재벌 계열사 간 순환출자와 같은 ‘왜곡된’ 소유지배구조로 인위적으로 묶여 있는 재벌을 약화·해체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재벌개혁론=재벌해체론’의 등식은 지나친 단순화다. 요즘 재벌해체론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왜곡된 재벌 소유지배구조를 개선하자는 것과 재벌을 약화·해체하자는 것은 다르다. 개혁진보 경제학자 중에서 재벌체제의 장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도 적지 않다.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재벌 개혁은 재벌 죽이기가 아니라 재벌을 아끼는 마음에서 거듭나게 하려는 것”이라며 ‘재벌사랑론’을 편다.
장 교수 등은 또 “개혁론자들은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거의 동일시한다”며 “재벌 개혁은 경제민주화를 위한 여러 과제 중 하나일 뿐인데 이를 무시한다”고 주장한다. 옳은 얘기다. 재벌 개혁은 경제민주화의 전부가 아니라 여러 과제 중 하나라는 점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실제 경제민주화 정책에는 재벌 개혁 외에 중소기업·상인 지원, 노동시장 개혁, 조세개혁 등을 망라한다. 개혁진보 학자들이 재벌 개혁 이외의 요소들을 무시한다는 말은 지나치다.
장 교수 등은 재벌과의 대타협론을 주장한다. 재벌과 타협해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노동·복지·세제 등에서 양보를 얻어내자는 것이다. 혁명을 할 것이 아니라면, 재벌 개혁을 포함한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 건설은 결국 사회적 대화를 통한 타협으로 이뤄내야 한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개혁진보 학계의 우려처럼 재벌이 ‘얻을 것 다 얻었는데 타협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재벌과 우리 사회 모두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대타협이 가능할지는 솔직히 확신이 안 선다. 이유는 재벌 총수의 완고함이 아니라 재벌체제의 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재벌과의 타협이 가능할까
삼성전자가 최근 납기 종료 이후 부당한 발주 취소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당한 사건은 좋은 사례다. 중소기업이 주문을 받은 뒤 납기에 맞춰 부품을 다 만들어놨지만, 삼성전자는 시장 상황이 변했다는 이유로 발주 취소를 하고 제대로 보상하지 않았다. 사실상 삼성이 재고 부담을 중소기업에 전가한 셈이다. 삼성전자는 이것을 정보기술(IT) 산업의 특성이라고 변명했다. 이런 현실이 고쳐지지 않는 한 중소기업은 경쟁력을 가질 수 없고, 궁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재벌이 타협을 하려면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 발주 취소, 담합 등과 같은 불법을 중단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재벌은 경쟁력을 잃고 수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재벌체제가 과연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장 교수 등과 개혁진보 학계는 개혁의 방법론에 차이가 있지만 지향점이 같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단순한 방법론의 차이로 인해 등을 돌린다면, 당파의 차이를 이유로 왜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다가 임진왜란을 자초한 이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장 교수 등과 개혁진보 학계가 분열하면, 통합진보당 사태처럼 경제민주화 반대 세력에게 악용될 수도 있다. 장 교수 등과 개혁진보 학자들은 개혁 연대를 해야 한다.
선임기자 한겨레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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