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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철이의 25번째 6월

등록 2012-06-13 17:58 수정 2020-05-03 04:26

박종철과 이한열이 살해당한 1987년, 나는 대학 3학년생이었다. 수많은 시민이 그랬듯 소심하고 겁 많은 나도, 거리에 있었다. 6월항쟁 25돌이다. 사반세기가 흘렀다. 6월항쟁은, 내게 교과서 속의 역사가 아니다. 떼어놓을 수 없는 삶의 일부다. 그해 6월의 뜨거웠던 거리는 내게 추억이자, 늘 새롭게 되새겨야 할 기억이다. 하지만 내게 한국전쟁이 체험하지 못한 역사이듯, 이즈음의 젊은이들에게는 6월항쟁이 그러하리라.
한국 현대사엔 민주주의의 결정적 고빗길이 여럿 있다. 6월항쟁이 그랬다. 서중석 교수는 8·15 해방과 4·19 혁명에 이은 한국 현대사의 ‘세 번째 해방’이라고 불렀다. 돌이켜보면 그해 6월10일부터 ‘6·29 선언’이 나온 6월29일까지 온 나라의 거리가 시민들의 물결로 출렁이리라 예견한 이는 없었던 듯하다. 전두환의 ‘4·13 호헌 조처’ 발표에도, 대학가는 잠잠했고 시민들은 일상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 무거운 침묵과 비겁을 뒤흔든 게 바로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이었다. 그때, 박종철은 스물세 살, 이한열은 스물한 살이었다.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으로 살해됐다. 경찰이 쫓던 선배의 소재를 불지 않았다는 게 살해의 이유였다. 연세대 경영학과 학생이던 이한열은 1987년 6월9일,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이 노태우를 ‘체육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발표하기 하루 전, 야당과 민주화 세력이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기 하루 전, 교내 시위를 하다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그해 7월5일 숨을 거뒀다.
그때 시민들은 왜 거리로 쏟아져나왔을까?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보다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외침이 더 많은 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생목숨을 끊어놓고도 “탁자를 턱 치니 억 하고 죽더라”던 독재정권 앞에서 더 이상의 침묵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부끄러움, 염치, 분노…. 독재도 민주주의도 결국 사람의 일이다. ‘박종철·이한열들’의 죽음 위에서, 지금 우리가 산다.
12월 대선을 앞둔 지금, 6월항쟁의 결과인 ‘87년 체제’가 시효를 다했다며 ‘2013년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선출된 권력인 국회의 정치를 불신해 법에 의탁하려 했던 87년의 선택은, 선출되지 않은 사법 권력의 ‘독재’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을 낳았다. 6월항쟁 직후 봇물 터진 듯 노동조합을 결성했던 노동자들은, 지금 노동하는 사람의 과반을 차지하는 비정규·불안정 노동을 품을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재벌은 통제 불능의 괴물이 됐고, 쌍용차 등 노동자의 죽음이 끊이지 않는다. ‘4대강 죽이기’에서 보듯 토건족의 식탐은 아귀를 뺨친다.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 10·4 정상선언 등 남북 화해협력의 노력도 보수세력의 필사적인 역공에 휘말려 질식사 직전이다. 새 길을 열기에도 벅찬데, 요즘 한국 사회는 오히려 6월항쟁 이전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시절로 역진할 듯한 분위기다. 공정보도를 외친 언론인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멀쩡한 국회의원을 상대로 ‘국가관’을 검증하겠다며 공개적인 전향을 강요하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집권여당과 보수언론에서 여과 없이 분출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많은 게 흐릿하다. “위기는 바로,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던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 귓전을 때리는 나날이다.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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