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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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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재벌?

등록 2012-03-27 17:18 수정 2020-05-03 04:26

내가 사는 집은 아파트다. 지난해 여름까지 살던 곳도 아파트였다. 그땐 재활용쓰레기를 아무 때나 내다버렸다. 재활용쓰레기를 모아두는 공용 공간이 있었다. 아파트 출입구마다 경비실도 있었다. 출퇴근 때 경비 아저씨와 정담을 나누고 소소한 부탁도 했다. 명절 때면 작은 선물도 건넸다. 그런데 지금 사는 아파트는 재활용쓰레기를 한 주에 하루만 내다버릴 수 있다. 일주일 동안 집 안에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아파트 입구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리는 자동문이 달려 있다. 외부인 출입 금지! 경비실은 서너 개 동에 한 곳뿐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재활용쓰레기를 모아둘 공용 공간을 마련하려면 주차 공간을 줄여야 한다. 이를 책임지고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 경비 아저씨의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관리비가 부담된다며 오히려 경비실을 통폐합해 경비 인력을 크게 줄이는 추세다. 나는 전에 살던 아파트 문화를 선호하는 쪽이다. 하지만 아파트 문화의 대세는 지금 사는 아파트 단지에 가깝다. 많은 경우, ‘내 차’ 세울 자리가 좁아지는 게 싫고, 관리비를 더 내는 것도 싫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고, 당장 나의 편리, 내 돈이 더 중요하다는 게다.
어느 고층 아파트 단지에서는 입주자들의 민원이 많다는 이유로 ‘강력한 조처’ 운운하며 우유와 신문 배달을 하는 사람들은 승강기를 이용하지 말라는 안내문을 내걸었다고 한다. 20층이라던데, 걸어서 오르내리며 배달하라고? 어느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는 신문과 우유 따위를 배달하는 업체에 승강기 사용료를 월 20만원씩 내라고 요구했단다. 배달할 때 승강기를 이용해 전기료가 더 들고 유지·보수 비용도 더 든다는 게 이유다. 또 다른 아파트 입주자회의에서는 청소하는 분이 청소할 때와 몸을 씻을 때 온수를 쓸 수 있게 하자는 안건이 부결됐다고 한다. 우유와 신문을 아파트 입구 경비실에 놓고 갈 테니 알아서 찾아가라고 하면, 입주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추운 겨울, 아파트 온수가 끊기면 난리가 나겠지?
선거철이다. 떡볶이·순대·빵 등 골목상권까지 파고든 재벌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비용과 노무관리 부담을 줄이려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빠르게 대체하는 기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신자유주의적 효율 지상주의는 누군가의 아들·딸을 청년실업자로, 누군가의 어머니·아버지를 비정규직으로 만든다. 우리 주변엔 스스로를 ‘유령인간’으로 여길 수밖에 없게 된 이들이 늘어만 간다. 재벌 개혁, 경제민주화 요구가 4·11 총선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배경이다.
그러니 생각해볼 일이다. 재활용쓰레기, 경비실 통폐합, 우유·신문 배달, 청소용 온수…. 사소해 보이지만 한결같이 누군가의 자존감, 그리고 생계와 이어진 무거운 선택이다. “그렇게 아낀 피 같은 관리비로 치킨을 시켜먹겠지”라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트위터에 남긴 짧은 글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찌른다.
우리들은 어떤 사람일까? 우리들은 어떤 세상에 살고 싶어 하는 것일까? 돈을 좇아 서로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우리들의 일상을 바꾸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총선·대선을 앞두고 깊이 고민해볼 문제다.
이제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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