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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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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후

등록 2012-02-11 15:05 수정 2020-05-03 04:26

였던가. 그 노래를 따라 부르다 울컥했다. 1981년 10월10일 서울운동장. 고1이던 소년은 넉 달 동안의 고된 훈련 끝에 제62회 전국체전 개회식 행사의 매스게임을 실수 없이 마친 터였다. 눈앞엔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전두환 각하’와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만족한 듯 웃고 있었다. 소년은 매스게임 훈련이 싫지 않았다. 훈련 덕에 수업은 오전 4교시만 했다. 하루에 한 번씩 나오는 빵과 우유를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방학 때도 훈련을 하느라 날마다 불려다녔는데, 그때 언론에서 ‘수업결손’ ‘강제동원’ 따위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하여튼 소년은 눈앞의 ‘각하’가 수많은 국민을 총칼로 죽인 학살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985년 대학생이 된 소년, 아니 청년은 ‘전두환’과 다시 대면해야 했다. 대한민국 국군이 대한민국 국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학살자는 대통령 자리를 꿰찼다. ‘자유의 수호자’라던 아메리카는 그 학살자를 워싱턴으로 불러 면죄부를 줬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선 대학 교정에 낭만 따위는 없었다. 최루탄, 화염병, 백골단, 투신자살, 분신자살, 할복자살…. 스무 살 청년의 가슴은 분노로 터질 듯했다. 꼭 그만큼 두려움도 커져만 갔다. 대학 4년, 청년을 키운 8할은 분노와 두려움이었다. 졸업식날 겨울비가 쏟아졌다. 아버지가 그러셨다. “서럽게 죽은 이들이 흘리는 눈물”이라고. 그때 감옥에도 가지 못하고 무사히 졸업한다는 건, 20대 청춘에겐 ‘불명예’였다. 아, 잊지 못할 기쁨도 있다. 3학년 때 참여한 87년 6월 항쟁이다. 군사독재의 폭압을 뚫고 전국 도심의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함성을, 서울시청 광장의 인파를, 중년의 몸은 아직도 기억한다.
1993년 스물아홉의 청년은 기자가 됐다. 청년은 합격 통보를 받은 다음날, 광주 망월동(현 국립5·18민주묘지)에 갔다. ‘묘비 없는 죽음’에 소주잔을 올리며 다짐했다.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청년은 대학 1학년생이던 1985년 여름 전남 강진에서 농촌활동을 마치고 망월동에 간 적이 있다. 그때 경찰의 감시를 따돌리며 황톳길을 걸어 망월동으로 가다 들은, 광주가 고향인 2학년 선배의 혼잣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언젠가 망월동이 국립묘지가 되고, 추모행사가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온 적이 있긴 하다. 그런데 기쁘지 않다. 아니 슬프다. 학살의 원흉은 감옥까지 다녀오고도, 5·18항쟁을 ‘폭동’이라고 비난하며 떵떵거리며 산다.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는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며 추징금 1673억원을 내지 않고 버티는 작자가 국가 원로 대접을 받으며 천수를 누릴 기세다. 그러나 중년이 된 한때의 소년에게 전두환은 한 번도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적이 없다. 학살자일 뿐이다.
지난 1월17일, 전두환 일당의 12·12 쿠데타에 맞섰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부인이 투신자살했다. 그 얼마 전, 전두환의 경호실장 노릇을 하며 대기업에서 5천만원을 받아 징역 2년6개월의 처벌을 받은 안현태가 국립묘지에 묻혔다. 이 나라는 아직, 박정희를 정치적 아버지로 여기는 ‘전두환의 나라’다.
서러운 죽음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가 부른 스무 번째 죽음, 대도시에 전기를 보내려면 송전탑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논밭을 강제수용당한 늙은 농부의 분신자결…. 민주공화국으로 가는 길은 멀다. ‘자유’를 외치는 티베트인들을 중국 공안이 학살하고 있다는 뉴스까지 접한 중년의 기자는, ‘전두환’이 자동연상돼 마음이 더 스산하다.
이제훈 편집장
*국제 뉴스를 맡았던 김순배씨가 기자 일을 그만두고 칠레로 떠나 국립칠레대학교에서 만학도의 삶을 새로 시작합니다.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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