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원흉이 지금/ 옥좌에 앉아 있다/ 학살에 치를 떨며 들고 일어선 시민들은 지금/ 죽어 잿더미로 쌓여 있거나/ 감옥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검사라는 이름의 작자들은 /권력의 담을 지켜주는 셰퍼드가 되어 으르렁대고 있다/… /판사라는 이름의 작자들은 /학살의 만행을 정당화시키는 꼭두각시가 되어/ 유죄판결을 내리고 있다/… //당신은 묻겠는가 이게 사실이냐고…”
김남주는 시 ‘학살3’에서 날선 언어로 법률가를 고발했다. 사반세기 전이다. 이제 모두 옛일이라고 할 수 있나. 김남주는 죽었으나, 학살의 원흉 전두환은 ‘전 재산 29만원’으로 골프를 치며 흥청망청이다. 검찰을 ‘견찰’ ‘떡검’ ‘섹검’ ‘스폰검’이라 조롱하는 세태를 보라.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 103조)고 자신할 수 있나. 대의민주주의 엔진인 선거의 정당성을 뿌리부터 뒤흔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테러 사건 수사에서 범행 관련자들의 금전거래를 확인하고도 은폐한 경찰과 청와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힘겹게 전진해온 대한민국의 법치는 이명박 정권 들어 돌연 절벽으로 굴러떨어졌다. 인권의 최후 보루여야 할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운동가들과 시민들의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다. 대한민국의 법치는 지금 아프다. 만신창이다.
그래도 시민들은 법에 의탁하려 한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방파제가 되려 헌신했던 법률가들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조영래를 기억하는가? 고작 7년을 변호사로 일하다 1990년 12월12일 43살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뜬, 사법연수원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으로 추앙한 그 조영래 말이다. 그를 모를 젊은 벗들을 위해, 조금만 되짚자.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렀던 1983년 이 세상에 나왔다. 저 뜨거웠던 1980년대 출세가 보장된 대학생들이 공장과 농촌, 빈민촌으로 뛰어들게 만든 “시대의 성전”(장기표)이다. “‘노동자’라는 말에 멸시를 보내며 ‘회사원’이라는 자만의 웃음을 질질 흘리던” 젊은 날의 ‘소금꽃나무’ 김진숙에게 노동자로서 자존감을 갖게 하고 동료 노동자를 향한 끝없는 사랑의 길을 부추긴 책이다. 이 책의 저자가 조영래라는 사실은, 그의 사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박정희 유신독재의 진면목을 만천하에 까발린 시대의 명문으로 불린 김지하의 ‘양심선언’을 직접 쓴 이도 조영래다.
‘반독재의 숨은 전위’ 조영래는 인권변호사로 거듭난다. 공익소송의 효시로 불리는 ‘망원동 수재 사건’이 그의 작품이다. 집단소송제도 없고 그 개념조차 낯설던 1984년, 그는 2300여 피해 가구를 조직하는 고단한 법정 투쟁 끝에 호우 피해는 천재(天災)가 아닌 국가의 책임임을 입증했다. 인권변호가 시국 형사사건에 머물던 시대에, 일반 국민의 일상에도 법률이 유용할 수 있음을 한국 사회에 알렸다.
1986년, 공장에 ‘위장취업’했다가 경찰에 붙잡힌 여대생이 성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하자 국가기관이 총동원돼 “성을 혁명의 도구화” 운운했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기억하는가.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로 시작하는 조영래의 변론요지서는 “이 시대 최고의 명문”(박원순)으로 꼽힌다. 조영래는 진실과 법의 정의를 세우는 과정에서 ‘변호사는 변론으로 말한다’는 불문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전례 없는 변호인단 기자회견을 조직하고 김수환 추기경을 ‘진실의 편’에 서게 하는 등 법정 안팎의 ‘힘’을 최대한 활용했다.
조영래는 차가운 이성과 합리의 상징인 법에 사랑과 열정,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인권은 본시부터 소수자의 몫”이라며 법이 희망일 수 있음을 창조적으로 입증하려고 하루 50개비가 넘는 담배를 태우며 노심초사했다. 조영래라는 “분별 있는 열정의 화신”(안경환)의 요절을 두고 “우리 시대 최대의 재앙”(홍성우)이라는 한탄이 나온 까닭이다.
그 조영래를 기억하며, 4회째를 맞은 ‘올해의 판결’ 특집기획을 내놓는다. 이 기획이 돈도 권력도 연줄도 없는 세상의 수많은 이들과, 온갖 어려움에도 민주와 인권의 최후 방파제로서 법의 존엄을 지키려는 ‘또 다른 조영래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훈 편집장
<font color="#A48B00">참고 문헌</font>: (안경환 지음·강 펴냄), (박원순 지음·두레 펴냄), (김진숙 지음·후마니타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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