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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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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만 중산층 사회

등록 2011-11-03 11:13 수정 2020-05-03 04:26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훗날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분수령으로 기록될지 모른다. 무엇이 분수령적인가? 거칠게 단순화하면, ‘중산층의 정치적 자기조직화’가 핵심이다. 이번 서울시장 보선에서 다수의 시민은 한나라당에 대한 정치적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주목할 대목은 민주당 등 기존 야권 정당이 아닌 새 인물과 세력을 통해 정치적 견해를 표출했다는 사실이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그들의 정치적 깃발이었다. 박 시장은 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로, 야권 단일후보로 나서서 시장이 됐다. 안 원장은 교육자이자 ‘성공한 기업가’다. 둘 다 소속 정당이 없고, 직업 정치인도 아니다. 의미심장한 변화다. 21세기 한국 정치의 메가트렌드를 선도하게 될까?
짚어볼 쟁점은 대략 이렇다. 왜 중산층인가? 왜 박원순·안철수에 환호하나? 사회·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중산층은 한국 사회의 다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중산층(중위소득의 50~150%에 해당하는 소득을 얻는 ‘중간소득 계층’)은 66.7%(2009년 기준)다. ‘1% 대 99% 체제’ ‘하우스푸어’ 따위가 상징하듯 중산층의 몰락이 운위되고 있지만, 한국의 중산층은 여전히 다수이고 일상이 고단해도 가난하진 않다. 세계 10위권의 무역강국 한국이 가난하지 않듯, 한국 사회의 다수도 가난하지 않다. 급진주의 정치 프로그램이 다수의 정치적 열광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토대다. 여전히 ‘빈곤 테제’와 ‘노동 정치’를 중시하는 진보정치 세력에 대한 지지부진한 지지, 정치적 급진주의와 선을 긋고 ‘온건·합리·개혁’ 노선을 걸어온 박원순·안철수에 대한 열광적 지지의 사회·정치적 맥락을 짚어볼 실마리다. 집권 한나라당은 홍준표 대표가 “믿을 건 강남뿐”이라며 ‘천기’를 누설한바, 한국의 다수 중산층에겐 ‘부자당’일 뿐이다. 반면에 제1야당 민주당은 그 자체로는 정치적 대안으로서 존재감이 미약하다. 야권 성향의 시민들이 내년 총선·대선 과정에서 ‘혁신과 통합’이 주도하는 범야권 통합정당 건설 노력에 힘을 실어줄지, ‘제3의 정치세력’ 형성에 자신의 정치적 열망을 투사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박 시장은 참여연대·아름다운재단·희망제작소 등의 시민운동 경력이 보여주듯 급진주의와 무관하다. 안 원장은 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한 적이 없는 기업가다. 둘 다 온건·합리·개혁 성향이다. 그런데 시민들이 박 시장과 안 원장을 대하는 태도에 미묘하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다. 거칠게 비유하면, 박 시장이 ‘위인’이라면, 안 원장은 ‘롤모델’이다. 안 원장은 천재적 엘리트이자 공익을 중시하는 양심적 기업 경영으로 수천억원대의 자산을 지닌 갑부다. 그러면서도 사회적 존경까지 한 몸에 받고 있다. ‘좋은 것만 모아놓은 사람’이다. 반면 박 시장은 대표적 시민운동가였지만 셋집에 살며 빚도 있다. 시민들에게 안 원장은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 모델’이라면, 박 시장은 ‘존경하지만 내가 그렇게 되기엔 부담스러운 인물’이다.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사회·정치적 의미가 다를 뿐만 아니라, 안 원장과 박 시장에 대한 시민들의 정치적 열광 정도를 가르는 주요 변수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민들이 박 시장과 안 원장을 자신의 정치적 깃발로 내세우려는 데는 둘을 묶는 공통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바로 ‘양심적 삶’과 ‘희망을 설득하는 능력’이다.
정리하자. 박 시장과 안 원장의 ‘사회공헌의 성공신화’는 중산층을 중핵으로 한 시민들의 정치적 자기조직화를 촉진하는 동력이자 희망의 등대다. 하지만 시민들이 ‘성공한 시민운동가’보다 ‘성공한 기업인’에게 더 열광하는 현실은 한국 사회의 미래와 관련해 깊은 고민을 요구한다. 연대의 꿈을 포기해선 안 되는 이유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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