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24일 한국방송(KBS) 뉴스에 일본 지바현 사쿠라시 시즈소학교(초등학교) 학교급식 현장에 관한 보도가 나왔다. 이 지역 농민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학교에 농산물을 싣고 와서 학생들에게 농산물에 관한 수업을 한다고 했다. 학교 안에는 학생들이 직접 작물을 가꾸는 텃밭도 있었다. 학교급식을 통해 학생들이 지역과 지역에 함께 사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하고, 식재료로 쓰이는 농산물의 중요성도 배우게 하겠다는 취지다.
이 보도 이후 5년이 지난 2011년 한국에 친환경 무상급식이 도입됐다. 한국의 무상급식은 더 이상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눈칫밥’을 먹여선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무상급식에는 복지를 위한 당위성만 있는 게 아니다. 시즈소학교 사례처럼 교육을 위한 당위성도 크다. 학생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친구들과 같은 먹거리를 공유하면서 많은 걸 학습한다. 내 식판에 제공되는 음식은 누가 만들어준 건지, 음식 재료는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생산돼 식탁 위로 왔는지, 모두 함께 한정된 음식을 나눠 먹으려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등을 배운다. 가까이 있는 친구와 급식실 조리사들부터 멀리 있는 농축산어민들까지 떠올리며 자신과 사회가 먹거리를 통해 연결돼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급식도 교육의 한 부분이라는 이런 인식은 이제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것은 학교가 더는 배움의 장이 아니라 거래의 장이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확히 1년 전인 2023년 7월18일 발생한 서울 서이초 교사 순직 사건을 통해 이런 상황을 명징하게 확인했다. 다수 학생과 학부모는 서비스 소비자가 되어 각종 요구를 쏟아내고, 교사와 학교는 서비스 제공자가 되어 이들의 민원 해결에 허덕인다. 교사는 학생에게 배움을 주는 스승이 아니라 지식을 주입하는 도구로서만 존재한다. 학생과 학생 사이 혹은 학생과 교사 사이에 분쟁이 발생해도 분쟁 해결 과정을 통해 뭔가를 배우는 게 아니라 법적 다툼을 하며 서로 자신이 피해자임을 호소한다.
학교급식실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호 표지이야기를 보면, 급식실에도 학부모들로부터 “왜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고기를 더 주지 않느냐” “면은 빨리 배고파지는데 왜 면을 줬느냐” “방사능이 불안한데 수산물은 왜 썼느냐” “아이가 이번 급식 너무 맛없었다고 하더라” “비빔밥 위의 달걀 왜 프라이로 안 해주느냐”와 같은 민원이 쏟아진다고 한다. 학부모들이 교육청과 함께 급식 현장에 직접 찾아와 위생 상태를 꼼꼼하게 점수화하면서 영양교사와 ‘여사’(조리실무사)들을 압박하는 학교도 있다. 이들은 그러면서도 여사들의 열악한 인력 현황과 노동 환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사들은 ‘그래도 되는’ 사람들로 여기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저임금 고강도 노동으로 인해 생활고와 각종 산업재해를 겪으며 고통받던 여사들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급식실에서 탈주하는 까닭이다. 경제적·물리적 고통 이상으로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 나에 대한 존중의 결여, 그리고 존엄의 부재다.
이 모든 것이 민주시민이 아니라 소비자로서 세상만사를 바라보는 세태의 결과다. 어쩌면 우리는 미래 세대에 지옥을 물려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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