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웨덴 예테보리대학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의 파비오 안조릴로 박사. 사진 본인 제공
국민과 국회를 상대로 불법 비상계엄을 선포한 대통령 윤석열의 탄핵을 촉구하는 응원봉이 광장을 가득 메웠던 2025년 3월, 스웨덴에서는 한국의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낸 보고서가 하나 나왔다. 매년 전세계 179개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지수화해 발표하는 스웨덴 예테보리대학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가 ‘민주주의 보고서 2025’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추락을 짚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보고서의 주 집필자 중 한 명인 파비오 안조릴로 박사는 한겨레21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 보고서는 전세계 민주주의 수준을 △자유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선거 독재체제 △폐쇄된 독재체제 단계로 나누는데 한국은 1년 새 단계(자유 민주주의→선거 민주주의)와 순위(2023년 36위→2024년 48위) 모두 크게 떨어져 ‘독재화가 진행 중인 국가’로 분류됐다.
한겨레21은 대통령 윤석열 파면 전후, 한국이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묻기 위해 안조릴로 박사 인터뷰에 나섰다. 이탈리아 로마 사피엔차대학과 볼로냐대학, 홍콩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그는 2022년 정당을 기반으로 한 독재 정권과 시민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해 미국정치학회의 버지니아 그레이 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조기 대선에서 반민주주의 정당의 존재를 제한하고 야당과 시민사회가 연합을 형성해야 ‘민주주의 유턴’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전자우편으로 3차례에 걸쳐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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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4일, 대통령 윤석열이 파면됐다.
“한국 민주주의를 위한 좋은 소식이다.”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한번 훼손된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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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의 위협은 반(反)민주주의적 성향의 정당들이 정당 시스템 내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면서 발생한다. 정당 체계 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이 낮아질수록 권위주의화 가능성은 커진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민주주의 정당들의 공조가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작용한다. 시민과 정당의 연대는 단순히 권위주의화를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 회복(유턴)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대통령 탄핵 후 한국은 빠르게 조기 대선 국면으로 전환하고 있다. 어떤 지도자가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을까.
“한국은 민주주의와 인권 옹호에 헌신한 지도자들이 대통령이 됐던 중요한 흐름이 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같은 진보 성향 지도자들은 과거 군사 독재 시절 인권을 위해 싸웠고, 민주주의로의 전환 이후에는 국민의 선택을 통해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섰다. 정당 시스템 안에서 반민주주의적 정당들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이 등장하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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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보고서 2025’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순위가 1년 사이 크게 하락했다.
“한국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선거 민주주의’ 국가 단계로 분류된 주된 이유는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법 집행’이 크게 약화됐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한국은 ‘매우 강한’ 수준의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법 집행을 유지해왔으나 이제는 하향 조정됐다.”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법 집행’이 약화됐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지표는 법이 얼마나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집행되고 시행되는지를 의미한다. 2024년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은 법 집행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렸다. 국가에 전쟁이나 침공 등 즉각적인 위협이 없는데도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발동하는 것은 예측 가능한 조치라고 볼 수 없다. 한국의 경우처럼 갑작스럽게 선포된 비상계엄이라면 더욱 그렇다.”
―연구진이 본 한국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공격받고 있다. 과거 대규모 부패 스캔들과 이후 수백만 명의 거리 시위, 이어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강화돼왔다. 그 후 대통령이 된 문재인은 과거 군사 독재 시절 인권 운동가였다. 그는 박근혜 정부 이전 수준으로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은 단임제이고, 2022년 대선에서 보수 성향의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됐다. 윤 대통령의 문재인 정부 인사들에 대한 보복성 조치, 성평등에 대한 공격 등으로 인해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다시 하락세로 전환됐다. 문재인 정부 시기의 민주주의 강화 노력은 사실상 무력화됐다.”
―보고서는 한국이 ‘독재화’되고 있는 국가라고 분류했다.
“한국은 과거 군사 독재를 거쳐 오랜 민주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젊은 민주주의 국가다. 현재 한국은 여전히 수준 높은 선거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에 노출된 상태다. 한국은 2016년 박근혜 정부가 시작한 권위주의화 경향을 되돌린 경험이 있으며, 현재의 흐름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스웨덴 예테보리대학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의 ‘민주주의 보고서 2025’에 실린 한국의 탄핵 촉구 집회 모습. 보고서 갈무리
―보고서에는 한국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시위 사진이 실렸다.
“윤 대통령의 계엄 시도는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 중 가장 극적인 일이었다. 이에 대한 시민들과 야당의 대응은, 물리적 권력을 부당하게 사용하려는 시도에 대해 민주주의적 저항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에 가장 긍정적인 흐름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의 자발적 행동이야말로 윤 대통령의 계엄령을 저지할 수 있었던 핵심 요소다.”
―다른 나라의 경우 지도자의 탄핵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회복하지 못한 사례가 있나.
“페루의 경우 부패와 폭력적 시위 진압으로 2022년 의회가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을 탄핵했지만 취약한 정치적 맥락과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린 정당 시스템으로 인해 정국 혼란이 이어져 이번 보고서에서 10대 독재화 국가 중 하나로 선정됐다.”
―경제 위기와 극우의 선동 속에 한국 정치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경제 위기와 불평등의 증가는 민주주의에 매우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반민주적인 정당들이 부상할 수 있다. 때문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시민사회 단체와 일반 대중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연합을 형성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이것이 대부분 국가에서 ‘민주주의 유턴’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이다.”
―시민들은 광장의 목소리가 보다 더 정치에 반영되길 염원하고 있다.
“한국의 정당 시스템은 여전히 특정 지도자와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이 주도하고 있으며, 정당들이 정책에 중점을 두는 경향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최근의 정치적 불안정은 시민과 정당 사이에 더욱 명확한 연결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시민 목소리가 좀더 강력하게 국회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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