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불리하면 사실도 ‘거짓’이다. 내게 유리하면 거짓은 ‘대안적 사실’이 된다. 약자와 소수자를 낙인찍어 공격하면 자연스레 다수가 내 편이다. 가짜뉴스와 갈라치기로 집권에 성공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그가 돌아왔다.
“이민국적법 제212조 F항에 따라, (…) 집권하면 모든 공산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대통령령을 발동할 것이다.”
2024년 미국 대통령선거 공화당 경선 후보로 나선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3년 6월24일(현지시각) 워싱턴에서 열린 보수적 기독교 압력단체 ‘신앙과 자유 연대’ 연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미국에 입국하려면 미국을 사랑해야 한다. 기독교인을 증오하는 외국의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미국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겠다”고도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언급한 법 조항은 “현재 또는 과거에 공산당이나 기타 전체주의 정당(혹은 그 하부 및 관련 조직) 당원이거나 그에 연관됐던 자는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입국을 금지한다”고 규정한다. 이 조항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한 이듬해인 1918년 만들어졌는데, 당시는 ‘공산주의 위협’이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미국 사회에 팽팽하던 시점이었다. 당시에도 예외는 인정돼, 이를테면 16살 이전에 입당했거나 일자리를 얻으려 당원이 된 경우 등은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후 이 조항은 관광 등을 목적으로 한 단순 방문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빨갱이 입국 금지’ 주장은 그가 집권 초기인 2017년 1월27일 발동한 이른바 ‘무슬림 입국 금지’(대통령령 제13769호) 조처와 닮았다. 당시에도 그는 ‘무슬림’과 ‘위험’을 등치시키면서, “미국 국익에 반하는 외국인의 입국은 얼마든지 금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이번엔 왜 ‘공산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를 겨냥했을까?
<타임> 등 미국 매체의 보도를 종합하면, 1919년 찰스 에밀 루텐버그가 창당한 미국공산당(CPUSA)의 현 당원 수는 약 1만5천 명이다. 이 가운데 매달 당비(일반 당원 5달러, 저소득 당원 2달러)를 내는 ‘진성당원’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연방 또는 주 정부 선출직에 당선된 공산당원도 없고,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통령선거에 후보도 내지 못했다. 미국공산당은 미국 내에서 ‘소수 중의 소수’다.
그럼에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산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를 꼬집어 ‘입국 금지’란 엄포를 놓은 이유가 있다. 국내적으로 보수 기독교도를 포함한 ‘반공’ 진영을 결집하는 한편, 대외적으론 ‘반중’ 정서를 자극해 역시 지지층 결집 효과를 볼 수 있어서다.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가 2023년 6월30일 발표한 ‘당내 최신 통계’ 자료를 보면, 2022년 말 현재 중국공산당 당원은 9804만1천 명에 이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4년 대선에서 승리해 재집권에 성공한다면, 1억 명에 가까운 중국 사회를 이끄는 핵심 엘리트층의 미국 입국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이 문제가 향후 미-중 갈등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4년 대선 운동을 2021년 임기를 마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시작했다. 부정확한 주장을 수도 없이 쏟아내는 것 말이다.”
미국 <시엔엔>(CNN) 방송은 2022년 11월15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출마를 선언하면서 내놓은 연설을 분석해 모두 스무 가지의 ‘가짜뉴스’를 골라냈다. 예를 들어 트럼프 전 대통령은 당시 연설에서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관련해 “850억달러 규모의 군사장비를 버려두고 왔다”며 조 바이든 대통령을 질타했다. 방송은 “850억달러란 수치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국방부는 버려진 장비가 71억달러 규모로, 이 가운데 일부는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밝힌 바 있다”고 짚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 전략으로 가짜뉴스와 갈라치기를 다시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명확하다. 2016년에도 성공적으로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오하이오주립대학 연구팀이 2016년 대선 운동의 과정과 결과를 분석해 2018년 3월 펴낸 보고서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연구팀은 대선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 쪽이 퍼뜨린 숱한 가짜뉴스 가운데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 건강 이상설 △클린턴 후보 국무장관 재임 시절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에 무기 판매설 △교황 프란치스코의 트럼프 후보 지지설 등 세 가지가 유권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추적했다. 이를 위해 1600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이 가운데 585명은 2012년 대선 때 민주당 후보로 나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지지자였다.
클린턴 후보 건강 이상설을 ‘사실’로 받아들인 유권자는 전체의 25%였다. 무기 판매설과 교황 지지설에 대해선 각각 35%와 10%가 ‘사실일 것’이라고 답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 지지층에선 △건강 이상설 12% △무기 판매설 20% △교황 지지설 8% 등으로 평균보다 낮았다. 그럼에도 파급은 컸다. 연구팀은 “오바마 전 대통령 지지층 가운데 세 가지 가짜뉴스를 모두 믿지 않은 유권자의 89%는 클린턴 후보를 지지했다. 반면 한 가지를 사실이라고 믿은 쪽은 61%,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모두 사실이라고 믿은 쪽은 단 17%만 클린턴 후보에게 표를 줬다”고 전했다.
미국 대선은 인구에 비례해 주별로 할당된 ‘선거인단’을 해당 주에서 단 1표라도 더 얻은 후보가 차지하는 ‘승자독식’ 구조로 치러진다. 격전지일수록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가짜뉴스’의 위력이 클 수밖에 없다. 2016년 대선에서 오바마 전 대통령 지지층 가운데 77%만 클린턴 후보를 지지했다. 4%는 소수정당 후보를 지지했고, 8%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10%는 아예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로 돌아섰다. 최종 개표 결과 트럼프 전 대통령(6298만여 표)은 클린턴 후보(6585만여 표)보다 얻은 표는 적었지만, 30개 주에서 승리를 거두며 무난히 당선됐다. 가짜뉴스의 ‘위대한 승리’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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