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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법 있는 곳으로는 못 돌아온, 퇴로가 없는 삶

누군가의 뜨거운 존경을, 누군가의 맹렬한 적개심을 동시에 받다 간 김종한 선생
등록 2022-10-22 08:50 수정 2022-12-09 05:14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운동가 혹은 간첩. 자발적 망명자 혹은 입국불허자. 반체제 혹은 친북 인사. 누군가에게는 뜨거운 존경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맹렬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킨 생이었다. 김종한 선생에게 항상 따라붙던 상반된 평가는 두 체제의 경계에서 떠돌아야 했던 그의 생애를 보여준다. 선생은 그 때문에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2022년 9월28일 독일에서 생을 다했다. 10월18일에는 베를린의 한 성당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선생이 한국을 떠난 지 53년째 되는 해였다.

경계에 선 사람들

194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김종한 선생은 서울 명지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1969년 스위스의 한 대학 장학금을 받으면서 유럽으로 왔다. 많은 한국 청년이 유럽에서 진보 사상에 눈뜨고 민주화운동을 위해 자발적인 조직화에 나선 시절이었다. 선생 또한 독일로 건너와 프랑스 파리, 스위스 취리히, 스웨덴 스톡홀름 등을 다니며 뜻을 같이하는 한국인을 모아 1974년 재독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 결성 등에 기여했지만 국외 민주화운동사에는 그의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가 ‘친북 인사’로 분류됐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이삼열 전 숭실대 교수는 한 기고에서 “친북한 잡지로 몰리던 <주체>의 발행인 정철제씨와 편집인 오석근씨도 (민건회 선언문) 명단에서 제외됐다”고 했다. 여기에도 아예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지만 김종한 선생은 <주체> 발간을 주도했다.

1973년 서베를린 한인 커뮤니티 곳곳에 ‘주체’라는 이름의 인쇄물이 뿌려졌다. 1967년 중앙정보부가 동베를린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유학생이나 예술가들을 강제로 한국으로 데려와 간첩으로 기소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서슬 퍼런 공안통치가 국외까지 뻗어 있던 시절이다. 교민사회는 둘로 쪼개져 서로를 ‘정보부’ 혹은 ‘빨갱이’로 부르며 대립했다. 김종한 선생은 자신이 <주체> 발행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지만 소문은 퍼져나갔다.

그러나 잡지를 직접 본 사람들은 잡지명과는 달리 주체사상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한반도 분단사와 종속이론 등을 주로 다뤘다고 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철저히 금지됐던 내용이라 청년들에게 처음 만나는 사회과학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분단된 국가에서 온 청년들은 카를 마르크스의 책 등을 사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호기심에 그곳에 있던 북한대사관에 들어가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다 북한에 포섭된 경우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대부분은 금지된 사상에 대한 열광이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알던 한 교민은 말했다.

북한 사회주의와의 비판적 거리두기

김종한 선생은 생전 자신이 간첩 혹은 친북 인사로 불리는 것에 “사상에 대한 찬성은 분명 있었지만 북한 당국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거나 어떠한 지령도 받은 일이 없다”는 답변을 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금 그 사실은 확인할 수 없지만 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한 교민은 “김종한 선생의 경우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북한 사회주의와 비판적 거리두기를 해왔다”고 했다. 김종한 선생의 가족들은 “북한에 수해가 크게 나 사람들이 굶주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쌀과 감자를 여러 톤 보냈다. 그래야 인민이 먹는다. 돈으로 보내면 그 돈이 어떻게 쓰일지 모른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전한다.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 지원을 거들었을 뿐 북한에서 아무것도 받은 게 없다는 증언이다.

선생은 북한뿐 아니라 당시 독일과 유럽에 있던 많은 학생과 민주화운동가를 지원했다. 본인은 정작 베를린자유대학 정치학 박사과정에 있다가 학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과 시장에서 채소를 팔았고 나중에는 채소 도매상을 했다. 1993년에는 베를린에 한글을 가르치는 세종학교를 열고 파독 광부나 간호사로 왔던 한국 출신 노동자들의 자녀를 지원하는 일을 했다. 많은 사람이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전향문의 일종인 자수서를 쓰지 않으면 입국할 수 없는 상황에 반대하며 선생은 단 한 번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2003년에는 송두율 교수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청으로 귀국했다가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국가보안법은 독재보다도 수명이 길었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임민식(80)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은 “김종한 선생과 나는 그 점에서 생각이 같았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한 한국에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임 의장은 ‘국회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면서 50년 넘도록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민건회를 함께 했다는 이유로 아직도 한국 땅을 밟지 못한 사람으로는 쾰른에서 택시 기사를 했던 김영무 선생이 알려져 있다. 그 외 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대부분 돌아가셨다. 국가보안법은 체제보다도 사람보다도 명이 길고, 남한 땅에 남아 있던 비전향 장기수처럼 국외의 비전향자들도 결국 사람이 명을 다해야 국가보안법에서 자유로워진다.

많은 사상이 파산한 자리에서

북한은 남한 진보운동의 멍에이자 질곡이다. 그러나 독재정권 시대 지식인들에게는 퇴로가 없었다. 수십 년 전 분단된 국가에서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고 독일 유학을 온 청년들이 금지된 사상에 대한 열광으로 학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제 그중 많은 사상이 파산한 자리에서 나는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반정권을 반국가로 모는 국가보안법 제7조 1항(반국가단체 활동 찬양·고무), 3항(이적단체 구성·가입), 5항(이적표현물 제작·소지·반포·취득) 등만은 아직도 엄연하다.

베를린(독일)=남은주 자유기고가 eunjoonam@web.de

*공부하는 늙은 엄마: 나이 오십에 독일 대학에 들어간 전직 기자의 이주 생활과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탐구.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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