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어느 늦은 밤, 뒷마당으로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여우를 만났다. 시 공식 통계로 ‘베를리너 여우’가 1천 마리다. 베를린에서 여우를 보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대부분의 여우는 고양이처럼 겁이 많거나, 새처럼 사람에게 무관심했다. 그런데 지금처럼 깜깜한 어둠 속에 눈을 번득이며 내게 달려오는 여우라니. 나는 그만 쓰레기봉투도 팽개치고 공동주택 현관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유리문 뒤에서 숨죽이고 있자니 여우가 내가 떨어뜨린 쓰레기봉투를 격렬하게 파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뒤 문을 조금 열어보니 여우는 보이지 않고 수십 가구가 함께 쓰는 너른 뒷마당에 우리 집 쓰레기봉투에서 나온 온갖 포장지와 종이 상자가 어둠 속에 희끗희끗 널려 있었다. 여우가 어딘가 숨어 있을 듯해 여전히 겁났지만 그보단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독일의 공동생활 규칙이 더 무서웠다.
한 손에 빗자루를 들고 어둠 속으로 조심조심 나서는데 갑자기 주변이 확 밝아졌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몇몇 집에서 뒷마당 쪽으로 난 베란다의 전등들이 켜지며 내가 쓰레기를 쉽게 치울 수 있도록 불을 밝혔다.
“독일엔 시시티브이(CCTV)가 거의 없지만 대신 ‘할머니 시시티브이’가 있다”는 한국 인터넷 게시판에 떠도는 말들은 대체로 사실이다. 분명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지하 창고에서 화분을 꺼내 왔는데, 이웃들이 무엇을 심을 거냐고 물을 때면 이 시시티브이의 성능을 실감한다. 이웃들이 시시티브이처럼 감시하고 신고한다는 불평도 꽤 있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 이웃 시시티브이는 여우가 나타나면 불을 밝혀주는 식으로 작동해왔다.
이 집에 이사 온 것은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하던 2년 전 겨울이었다. 슈퍼마켓 계산대에 내가 줄을 서면 사람들이 중국인으로 여기고 다른 줄로 피해가던 때였다. 거리는 흉흉하고 집 안은 적막했다. 그때 위층에 사는 사비네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은퇴할 때까지 회사에서 외국 직원들을 교육하는 일을 했다는 사비네는 그날부터 거의 반년 동안 저녁마다 우리 집에서 책읽기 모임을 했다. 하인즈 할아버지는 도울 일이 생기면 무엇이든 말하라고 당부했다. 옆집 클루스 할머니는 무슨 날만 되면 문 앞을 예쁘게 꾸민다.
노인들만이 아니다. 공동주택 젊은 부모들은 핼러윈데이 때는 같이 사탕을 얻으러 다니고, 12월엔 뒷마당에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고 캐럴 모임을 열었다. 이곳이 유별나긴 하지만 이사 오기 전 살던 집에서도 팬데믹이 시작되자마자 이웃에게서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달라고 영어로 쓰인 엽서를 받았다. 사비네는 그것을 ‘독일의 나흐바르샤프트(이웃정신)’라고 부른다.
오후 3시 해가 지고 나면 시내에조차 인적이 드물던 지독한 고립의 시기, 독일의 이웃주의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해 겨울을 넘겼을까.
감염병 대유행은 사람에 대한 커다란 갈증을 남겼다. 거리두기가 풀리자마자 단체로 노를 젓는 조정클럽에 가입했다. 이곳에서 아이는 한국돈으로 2만원, 어른은 4만원 정도를 내고 한 달간 매주 배를 탄다. 조정은 단체 스포츠라 팀원들 실력이 비슷해야 하는데, 나같이 뒤처진 사람을 위해 무려 서울올림픽에도 코치로 참여한, 왕년에 유명했던 조정 선수가 개인강습을 해줬다. 아이들은 주말이면 무료로 클럽에서 먹고 자고 캠핑을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조정은 원래 엘리트 남자 학생들을 위한 스포츠였다. 소설 <레슨 인 케미스트리>엔 여자를 꺼리는 불과 몇십 년 전 미국의 배타적인 조정클럽 분위기가 묘사돼 있다. 그런데 우리 클럽엔 여자 노인이 더 많다. 카탈로그를 보면 1901년 작가인 리하르트 노르트하우젠이 “모두를 위한 조정”을 꿈꾸며 우리 클럽을 만들었다. 조정클럽뿐 아니라 독일 전역에서 ‘국민스포츠’ 이념이 번성하던 시기였다.
조정클럽의 발전은 대체로 비슷하다. 회원들의 기부로 가장 중요한 자산인 배와 선착장을 구매해 공동자산으로 엄격히 관리한다.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는 노동 규칙과 관리자들의 헌신으로 유지된다. 조정클럽 청소년팀은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배를 타면서 바람만 불어도 배가 타고 싶어 두근거리는 조정 중독자로 길러낸다. 우리 아이가 조정클럽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너희도 크면 똑같이 봉사하라는 말이다.
통계는 없지만 대형 클럽들을 검색해보니 많은 클럽이 대개 공동자산에 보태 한 해 지출의 30%가량을 지방자치단체나 전국조정협회 등 스포츠단체에서 보조금을 받아 살림을 꾸린다. 아이와 외국인에게는 더 적은 회비를 받는 클럽의 공공성은 공공지원 덕에 가능한 게 아닐까.
2022년 베를린에서 스포츠 동호회 회원은 70만 명 정도 된다. 시 인구 5분의 1쯤 되는 수다. 이웃과 동호회 조직은 독일의 핏줄과도 같은 네트워크다. 헌신적 자원봉사와 공공의 지원이 이 네트워크를 돌린다. 그런데 최근 독일의 극우당 ‘독일을 위한 대안’이나 여러 극우조직에서 동호회와 이웃 네트워크에 조직적 침투를 의결하면서 격렬한 논쟁이 시작됐다. 어떤 이들은 나치도 독일 국민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독일 네트워크는 오직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클럽이나 이웃모임을 보면 독일 민주주의가 시작된 곳이 여기가 아닐까 싶다. 독일의 풀뿌리 조직들이 극우로 물든다면 독일은 다시 한번 후퇴의 길을 가게 되리라.
베를린(독일)=남은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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