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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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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제하지 않고 망하지 않고 졸업할 수 있겠니

자기 효능감을 얻기 위해 하는 공부, 자기 비하가 일상이 된 학업
등록 2022-12-14 23:19 수정 2022-12-16 13:20
일러스트레이션 구둘래

일러스트레이션 구둘래

“불합격입니다. 확실한 불합격이에요.”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에서 주인공 영문학과 교수 스토너는 워커라는 학생의 박사학위 심사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스토너가 학과장의 총애를 받는, 배경 좋은 워커를 단죄하는 이 장면에 많은 독자가 박수를 보내지만 조금 전 스토너 같은 깐깐하고 성실한 교수 앞에서 발표수업을 망치고 온 내 생각은 다르다. “분명 알고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는 워커의 말이 사실일 것이다. ‘산전 진단의 비윤리성’에 관해 2주를 준비해 15분 만에 말아먹은 내가 보기엔 틀림없이 그렇다.

파워포인트가 켜진 순간 문장들이 머리에서 조각조각 흩어졌다. 포유류에게 위험이 닥쳤을 때 반응한다는 뇌의 편도체만 벌겋게 일어서서 본동사들이 모두 날아간 말도 안 되는 독일어를 주절거리고 있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 저 학생은 지독히 모자라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수가 작성한 평가노트엔 분명히 스토너가 워커한테 던진 비난과 비슷한 내용이 남아 있을 것이다.

30%에 들지 않기 위하여

사회보건학 교수는 의학용어와 억센 베를린 사투리를 섞어 쓰는데, 강의 첫날 나는 그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텍스트 자료를 받을 수 없냐고 물었다가 싫은 소리를 된통 들었다. 내 독일어 수준이 엉성하다는 교수의 말이 틀린 게 없었지만 장애인으로 내과와 정신과를 섭렵한 의사인 그를 존경할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었다. 장애인은 남에게 친절하려니 생각했던 자신을 쓰디쓴 기분으로 돌아봤다. 공부란 자기 확신, 자기 효능감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인데 자기 비하가 일상이 됐다.

독일 교육통계를 보면 대학을 마치지 못하는 학생이 한 해 보통 29~32% 된다. 학업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많지만 의대나 법대는 졸업률이 90% 이상인데 수학이나 일부 기초 자연과학 과목은 50%가 안 되는 것을 보면 적성에 맞지 않거나 취업을 위해서 그만두는 학생도 많아 보인다.

독일어가 모국어인 학생에게는 크게 어려울 것 같지 않은 우리 과에서도 지난 학기 낙제 경고를 받고 구술시험을 치르는 학생이 30% 정도였다. 그나저나 당연히 재시험 대상인 줄 알았던 내가 시험장에 오지 않자 다들 걱정했단다. “어쩌려고 그래. 포기할 거야?” 다른 학생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내가 생각하는 자아상이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이다. 바보 중의 상바보.

늙은 개가 새로운 재주를 배우려다

독일 교육에서 읽고 정답을 적는 기능은 별 쓸모가 없다. 독일 중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는 한 학기에 두 번 성적표를 받는데 중간성적은 발표와 수업참여, 과제 수행만으로 매겨진다. 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처럼 독일의 아비투어도 구술시험이 중요하다. 대학에서도 교수와 학생이 개념 정의, 사례, 평가를 서로 말로 주고받는 수업이 허다한데 나는 같은 뜻을 말해도 독일어가 영어보다 1.5배쯤 길기 때문에 독일 사람이 영국인보다 2배쯤 말을 빨리 하는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나는 몇 개의 단어를 적어보다가 그만 포기하고 만다. 보통 4시간씩 진행되는 수업에서 집중력을 발휘해도 잠시일 뿐 결국 얼마 알아듣지 못한 채 강의실을 나가게 되리라는 낭패감에 미리 정복당하고 만다.

이런 낭패감이 낯설지는 않다. 몇 년 전 한국에서 기자로 일하던 시절 토익 시험을 보러 갔더니 2교시쯤 되니 눈이 흐릿해져서 시험지가 잘 보이지 않고, 리스닝 시험에선 가는귀먹은 게 아닌가 싶었다. 인지기능과 복합적 과제 수행을 담당하는 전두엽 피질이 쇠퇴하는 건 기본, 나이 들면 시험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 치러야 한다. 기자실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고참 기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오엠아르(OMR) 답안지에 하나씩 밀려 표기했다는 등 죄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늙은 개에게 새로운 재주를 가르칠 수 없다”는 한 영국 극작가의 오래된 경구나 “어린 한스가 못한 것은 늙은 한스가 할 수 없다”는 독일 속담을 보면 유럽인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은 그야말로 근대의 것, 특히나 지성 체계를 흔들었던 역사적 경험을 지니고 그 무대에서 절대 퇴장하지 않으려는 68혁명 세대가 만들어낸 자기 확신 같은 게 아니었을까. 68혁명 세대는 학교 안 배움을 노동자에게로, 거리로 끌어냈는데, 나는 거리를 오래 쏘다니다가 다시 강의실로 왔다.

배움으로 얻고자 하는 것

가끔 반짝이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지난 학기엔 모두가 싫어하는 사회복지 정책론이 나의 ‘최애’ 과목이었다. 기자생활이 아니었다면 지루한 통계를 보며 역동적 사연들을 떠올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발표는 망했지만 ‘산전 진단’이라는 주제가 빚어낸 여성주의, 극우 보수주의, 기독교 생명주의 사이의 긴장된 논쟁을 사랑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개념을 조심스럽게 쌓아가는 순간이다.

“나는 나와 비슷한 마음을 지녔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달리기와 존재하기>의 작가 조지 쉬언은 이렇게 썼다. 통계와 개념과 논쟁을 지나다보면 나와 비슷한 마음을 지닌 선조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지치고 주눅 드는 마음을 자꾸 펴면서 여기 앉아 있다.

베를린(독일)=남은주 자유기고가

*공부하는 늙은 엄마: 나이 오십에 독일 대학에 들어간 전직 기자의 이주 생활과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탐구.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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