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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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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여성 난민, 한 달 새 2천 명 임신?

진보의 판타지, 보수의 집념이 느껴지는 신문 기사의 오역들
등록 2023-02-24 23:12 수정 2023-03-03 15:42
일러스트레이션 구둘래 

일러스트레이션 구둘래 

2021년 8월 미군이 갑작스레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한 달 뒤 우리 언론에 ‘아프간 여성 난민, 한 달 새 2천 명 임신’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아프간을 탈출한 사람들이 독일에 있는 미 공군기지에 임시 수용됐는데 그 기지에서 한 달 만에 임신한 여성이 2천 명에 이른다고 미 <시엔엔>(CNN) 뉴스를 인용해 보도했다.

그해 9월25일 밤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 기사를 봤다. 기사에는 난민캠프에서 아이를 가진 여성들을 비난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섹스에 환장한 짐승들’ ‘바퀴벌레’라며 욕을 퍼붓고, ‘무슬림의 번식력이 세계를 집어삼킬 것’이라고 장담하던 말들을 기억한다.

가짜뉴스의 탄생

최초 보도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기사를 처음 한 일간지에서 봤고 다음날 아침 몇몇 인터넷 언론이 이 기사를 고스란히 베껴쓰기 시작했다.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입견이 낳은 오역, 오역이 만든 가짜뉴스가 다시 수많은 혐오 댓글을 퍼뜨리는 모습이 과연 바퀴벌레의 번식 과정을 보는 듯했다.

실제론 이랬다. 원래 <시엔엔> 기사는 “‘람슈타인 공군기지에서 벌써 22명이 태어났고 앞으로 그 수는 가파르게 늘 것이다. 여성 3천 명 중 3분의 2가 임신한 상태이며 이들이 람슈타인에 머무를 시간과 의료인력 등이 요구된다’는 기지 관계자의 전언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니까 기지에 도착한 여성 대부분이 이미 임신한 상태였는데, 아마 긴박한 상황에서 노약자와 임산부 등을 우선 철수시켰기 때문이라는 게 합리적 추측이다.

도대체 어떻게 2천 명이 한 달 만에 임신하고 그 임신 사실까지 확인할 수 있었겠는가. 매일 기지에서 임신테스트를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기자나 데스크나 댓글을 쓴 사람들은 왜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 확인도 정정도 하지 않는 가짜 외신 보도를 여러 차례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인터넷 기사는 슬그머니 고쳐지거나 사라졌지만 그 일간지 기사와 댓글은 아직도 숙주처럼 포털 사이트에 그대로 버티고 있다. 국내 문제였다면 있을 수 없는 대처다.

일본 통해 본 한국 촛불, 영국의 눈으로 본 유럽

바깥에서 한국 신문을 보니 국제뉴스에 대한 오역과 왜곡에 가슴이 졸아든다. 기자 시절 국제면에 통 관심이 없었던 무지하고 게으른 나를 돌아보게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혼란스러운 보도는 애교 수준이다. 러시아가 자포리자 원전을 장악했는데 러시아가 원전을 ‘폭격’했다는 건 무슨 말이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을 러시아가 폭파했다고 단정한 것은 또 무슨 자신감일까.

대부분 영국 신문을 참조해 기사를 쓰니 주로 영국의 눈으로 유럽을 본다. 일본 언론을 통해 한국을 이해하다보니 한국 촛불혁명을 혼란이나 무질서로 전했다는 외신과 다를 것이 없다.

독일 뉴스는 사상전에 자주 동원된다. 한국에서 무상급식 찬반논쟁이 한창일 때 분명 독일에서도 무상급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베를린에 와보니 무상급식이 없었다. 사회적 수급 대상자에게 교과서, 교통비, 점심값 등 복지 항목을 꼼꼼히 하는 것이 이들의 복지 방식이었다. 1980년대쯤 독일에서 유학한 사람들이 지금은 폐지된 당시의 정책이나 일부 지방 사례를 독일의 모범 사례처럼 적기도 한다.

진보의 눈으로 가끔 독일 판타지가 만들어진다면, 보수우익의 보도에선 진보 정책은 실패한다는 것을 입증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느껴진다. 한국에서 임대차3법 시행을 앞뒀을 때,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독일이 임대료 인상을 억제한 결과 집값이 폭등했다”는 제법 구체적이고 정성스럽게 만든 가짜뉴스가 돌아다녔다.

정확히 그 발원지인지는 모르지만 한 보수신문이 쓴 “문 정부가 꿈꾸는 ‘임대주택 천국’… 독일도 집값 폭등, 무주택자만 운다”는 기사와 맥을 같이한다. 이 기사는 “독일이 유럽에서 자산 불평등이 가장 심각하다”는 독일경제연구소(DIW)의 발표를 제시하며 그 이유가 임차인 보호를 잘해서 자가보유율이 낮기 때문이라는, 통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편다. 알려진 사실과 몇 개 논문에서 원하는 대목만을 짜깁기해 완전히 새로운 사실을 탄생시킨 결과다. 바로 그 독일경제연구소가 “독일인들이 임대소득으로는 부를 창출하지 못했다”며 “상속세 강화만이 자산 불평등을 해결할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린 사실은 빼버리고, 한국 보수신문은 갑자기 “탈원전으로 주택 공급이 제한됐기 때문”이라는 기상천외한 결론을 맺는다.

독일인도 처음 듣는 독일발 특종

독일 녹색당이 탈원전 취소에 찬성했다는 오보는 이미 한국에도 알려졌다. 독일에서는 원래 2022년 말로 예정됐던 마지막 원전 폐쇄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2023년 4월까지로 연장됐고 녹색당은 이 기회에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는 주장을 계속했다. 그럼에도 한국 신문들은 희망을 담아 계속 ‘독일도 탈원전 유턴’이라는 제목을 단다. 독일인도 처음 듣는 뉴스니 특종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사실이 아니라는 점만 빼면.

악의가 없더라도 국제뉴스란 늘 왜곡과 오보 위험 앞에서 아슬아슬하다. 얼마 전 독일 주간지 <슈피겔>이 오역 논란에 시달렸다. <슈피겔>은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와 한 인터뷰에서 “나는 억지로라도 독일 숄츠 총리가 우크라이나를 도울 수밖에 없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가 오역 지적을 받고 “우크라이나를 돕도록 촉구할 것”이라고 고쳤다. 그사이 여러 국제통신사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강경 발언을 각국에 전했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젤렌스키는 서방이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줄 안다”는 이미지가 퍼졌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는 같은 발언을 두고 “내 임무는 서구 국가들이 우리를 돕도록 하는 것입니다”라고 훨씬 외교적 어투로 번역했다.

사정이 이러니 갈수록 독일 소식을 담은 기사를 쓸 때면 손을 벌벌 떨게 된다. 언어의 경계를 넘을 때, 가끔 번역자의 의도만 국경을 통과해버린다. 뉴스란 얼마나 왜곡되기 쉬운 것인가.

베를린(독일)=남은주 자유기고가·번역가 eunjoonam@web.de

*공부하는 늙은 엄마: 나이 오십에 독일 대학에 들어간 전직 기자의 이주 생활과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탐구.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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