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오십에 대학에 들어갔다. 세상에. 대학 신입생이 될 거라고 했더니 한국으로 치면 중학교 3학년인 딸이 화들짝 놀랐다. “그럼 몇 년 뒤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 우리 같이 대학을 다니는 거야? 세상에.”
지난겨울 독일 베를린에 있는 난민지원기관 수십 곳에 이력서를 보냈다. 가장 일손이 모자라는 분야라는 소문처럼 구인광고가 넘쳐났다.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독일의 난민정책에 관심이 많아서 회사를 그만두고 베를린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보내놓고 몇 주 동안 인터뷰 연습을 했지만, “저는 팀과 협력하는 것을 좋아하고 거대한 도전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공들인 멘트를 들어준 것은 침실 벽밖에 없었다. 난민수용시설에서 야간 당번을 할 수 있겠냐는 전화가 한 통, 노동허가가 있는지 물어보는 전화가 몇 통 왔을 뿐이다. 노동허가는커녕 비자 기한이 거의 다 돼 있었다. 비자 없는 디아스포라를 위한 단체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내가 딸을 데리고 거기 입소해야 할 판이었다.
학교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했다. 독일에서 학위를 취득하면 해당 직업 자격도 얻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비자가 나온다. 문제는 독일에서 사회복지사 자격은 학사과정을 거쳐야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무 살 독일 대학 신입생들과 함께 오리엔테이션을 받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종착역을 몰라도 일단 직진하는 나라, 그것도 남보다 빨리 직선 달리기를 해야 살아남는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30년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대폭 후진을 하게 되니 혼자 땅바닥에 엎어진 기분이 들었다. 나이듦의 어려운 점은 불안과 회의를 나눌 사람이 점점 적어진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고민을 하던 대학 친구들은 뿔뿔이 헤어져 각자의 사정에 시달리고, 전투적으로 일과 육아를 병행하던 동지들은 줄줄이 퇴사했고, 나 또한 회사를 그만두고 외국에 살다보니 전우는 간 데 없고 30년 전에도 했던 질문의 깃발만 다시 나부꼈다. 졸업은 할 수 있을까? 졸업하면 과연 취업은 될까? 과연 이 길이 내 길일까?
그 무렵 독일 남쪽 도시인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전화가 왔다. 옛날 같으면 벌써 늙어 죽었을 나이에 진로 고민에 빠져 있다고 했더니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난 지난해부터 세무보조사 아우스빌둥을 다니고 있어. 내년에 졸업이야.” 아우스빌둥은 대학에 가지 않고 바로 직업을 택하는 사람들을 위한 직업전문학교이다. 친구는 일주일에 두세 번 학교에 가고 나머지는 세무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배운다. 2020년 독일 바이에른주 통계를 보면 아우스빌둥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평균연령은 18.9살이다. 독일 사람과 결혼해 아이 셋을 키운 친구는 첫째 아들과 비슷한 나이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한다. 인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미 일하는 또 다른 친구는 원격수업을 하는 대학에서 회계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전우들은 있었다. 게릴라처럼 은밀히 배우고 있었다.
하루는 독일 대학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만들기 위해 번역사와 통화했다. 번역사는 내 지원서를 보더니 자신도 얼마 전 대학에 입학했다고 이야기했다. 번역일을 오래 하다보니 좋은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서 컴퓨터공학과에 갔단다. 해보니 너무 어려워서 프로그래밍까지 할 자신이 없어졌지만 배우는 것 자체가 기쁨이라고 했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나이가 나보다 10년쯤 더 들었을 듯했다.
독일은 대학진학률이 한국보다 낮은데 재교육률은 높은 편이다. 평균 대학 입학 연령이 23살로 한국의 20살보다 높은 이유는, 아우스빌둥 같은 제도로 먼저 직업을 경험하고 대학에 가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게다가 40~64살 대학 신입생 수는 7만8천 명으로, 한국 1만6천 명에 견줘 압도적으로 많다. 장년층이 평생교육이나 직업전환을 위해 대학에 간다는 뜻이다. 노동 가능 연령은 점점 길어지고 노동시장은 변화무쌍하기에, 많은 노동자가 다시 혹은 뒤늦게 대학에 간다.
그런데 실은 대학에 가는 행동에는 가파른 세상에서 살아남는 실용적 대처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한겨레21> 기자였던 시절 대학을 가지 않고 독학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쓴 일이 있었다. 기사가 나가고 독자들에게 받은 전자우편 내용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기사를 보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지 못했던 삶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기억이 맞는다면 그중 한 독자는 이렇게 적었다. 무엇이 그렇게 마음 아픈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단순히 학력 위주의 사회에서 느낀 좌절 때문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전해졌다.
우리에겐 여러 정체성이 있는데 교육은 그중 한 정체성을 실현하고 싶은 열망이다. 어쩌면 정체성이 아니라 욕망일 수 있다. 나는 가장 밑바닥에서 볼 때 사회의 끓어오르는 점이 가장 잘 보인다고 생각했고 그 밑바닥을 보고 싶은 욕망에 쫓겨왔다. 이주노동은 어느 나라에서든 가장 밑바닥이지만 가장 역동적이고 언젠가 위와 아래를 뒤집어놓을 지점이라고 믿는다. 지금은, 아는 것도 없고 진입할 자격도 없으므로, 일단 배운다.
나보다 먼저 배움을 시작한 이들은 대개 내 스승과도 같았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서는 50살에 아우스빌둥을 시작한 사람들을 소개하는 기획 기사를 실었는데, 나는 대학에 지원서를 낼 무렵 요양보호사가 되기 위해 아우스빌둥을 하는 57살 외르크 라리슈의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이 직업의 가장 좋은 순간은 노인들의 몸을 씻어주는 아침이다. 나는 한평생 일해온 사람들의 몸을 존경을 담아 다루고, 그 덕분에 노인들로부터 감사받는 이 순간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라리슈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나는 한참 멀었다. 하지만 “앞으로 20년은 더 일하고 싶다. 50살 이후에도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늦게 무언가를 시작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다.
베를린(독일)=남은주 자유기고가 eunjoonam@web.de
*공부하는 늙은 엄마: 나이 오십에 독일 대학에 들어간 전직 기자의 이주 생활과 나이든다는 것에 대한 탐구.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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