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는 망했다. 금요일에 무려 12시간 수업이 몰렸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강의실에 앉아 있으려니 마지막 수업쯤 가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게 다 수강신청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독일 대학도 수강신청은 전쟁이다. 한국은 1초 차이로 성공과 실패가 엇갈리는 ‘광클 전쟁’이라는데 내가 다니는 대학은 다 같이 모여서 제비를 뽑고 또 뽑는 운과 눈치 전쟁을 치른다. 규칙은 단순하다. 해당 학년의 수강신청일이면 학생과 교직원이 온라인 회의실에 모인다. 진행자가 과목명을 말하면 각자 원하는 코스를 적어 낸다. 편한 시간대와 학점 인심이 후한 선생님에게 학생이 몰리는 것은 한국이나 독일이나 똑같다. 결국 인기 과목은 제비뽑기로 누가 수강할지 정해진다.
운명을 바꿀 방법이 딱 하나 있다. 모든 학생은 제비뽑기에 떨어져도 그 과목을 들을 수 있는 수강신청 우선권을 하나씩 갖는다. 그런데 이 우선권을 꼭 필요한 곳에 쓰지 않고 일찍 휘둘렀다가는 나처럼 모두가 기피하는 금요일 밤에 수업을 듣는 참사를 맞기 때문에 운도 운이지만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패를 낼 때까지 고심을 거듭하는 이 수강신청은 포커게임을 닮았고 그래서인지 우선권을 ‘조커’라고 부른다. 돌봐야 할 아이가 있거나 장애가 있거나 학생회 일을 맡은 사람들은 조커를 추가로 받는다. 지난달 둘째를 낳은 친구 킴벌리는 조커가 무려 3개로 원하는 수업은 무엇이든 들을 수 있다.
제비뽑기하고, 조커를 쓸 사람을 정하고, 탈락자가 결과에 승복하는지 일일이 묻느라 수강신청은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5시나 돼서야 끝나곤 한다. 그나마 코로나19를 계기로 온라인 회의로 바뀌었지 그 전에는 강당에 모여 종일 이런 의식을 치렀을 것을 상상하니, 속도에 강한 한국인이라면 치를 떨 만한 비효율적인 광경이다. 게다가 공정이 능력주의와 같은 말이라고 여겨왔다면 모성, 장애인, 학생회 활동가에게 우선권을 내주는 방식에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다른 배경의 도움 없이 혼자 힘껏 달려 목표를 이루는 사회가 공정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공정성에 대한 감각이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잘 달리는 사람과 빨리 달리기 어려운 사람이 나란히 출발선에 서서 속도 경쟁을 해야 한다면 그 자체가 틀렸다고 한다.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도 집에 인터넷이 느리거나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불리함을 감수하지 않아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잇따랐고 학생회 주도로 제비뽑기를 도입했다.
나이 많은 외국 학생인 나는 그 뒤에도 여러 번 조커를 받았다. 지난봄, 첫 학기가 시작되자 한 교수가 나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어려운 일은 없는지 물어보고 우리 학교엔 다른 대학처럼 외국 학생을 위한 독일어 코스가 없어서 미안하다며 곧 튜터를 마련해 과제와 시험을 돕겠다고 했다. 튜터는 선배 학생들이 후배를 가르치는 제도다. 그 뒤에도 누군가 지금 상황이 너에게 불리하지 않은지 먼저 물어봐주는 일은 여러 번 거듭됐다. 우리 과 학생회 대표는 어느 날 문득 문자를 보내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은 시험이나 발표에서 이를 고려해 채점하라는 규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내가 시험에서 불리하다 싶으면 가만있지 말고 항의하라는 뜻이다.
출발선이 기울어지지 않았는지를 살피는 일은 당연히 입학부터 시작된다. 2020년 베를린에서 한 여학생이 아비투어(시험) 연기를 요청하는 행정소송을 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학교가 온라인수업을 거듭하던 시절, “비좁고 불편한 주거 환경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이 4주 넘게 학교나 도서관에서 공부하지 못한 상황에서 치르는 시험은 공정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그 뒤 다른 주에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학생들에게 일부 과목에서 재시험 기회를 줬다.
마이클 샌델은 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 시대의 고등교육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특권층 부모가 자녀에게 특권을 물려줄 좋은 기회만 제공한다”며 “일정 수준을 넘은 학생들을 모아 차라리 제비뽑기로 대학 신입생을 선발함으로써 능력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경쟁 선발형인 미국과 한국의 대학들과 달리 독일은 아비투어라고 하는 고등교육 자격시험을 통과하면 입학 허가를 받도록 돼 있다. 독일 사회가 교육 기회 공정에 유독 예민한 이유는 대학에서 유대인을 배제했던 나치 시절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 1970년 ‘모두를 위한 교육’이라는 교육 대개혁을 만들어낸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많은 대학 졸업자를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회의론도 끊이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실용적 직업교육 위주였던 독일이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 목매면서 학사학위를 크게 늘렸지만 계층이동성이나 평등지수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지적이다.
독일 총리 올라프 숄츠는 2021년 한 언론 기고문에서 “능력주의 사회가 감추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노동분업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하며 “소득보다 간호, 배달, 돌봄 등 시스템을 유지하는 노동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숄츠가 마이클 샌델의 철학에 크게 영향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공정한 교육이란 언제나 불완전하다. 결국엔 공정한 노동에 달려 있다.
베를린(독일)=남은주 자유기고가
*공부하는 늙은 엄마: 나이 오십에 독일 대학에 들어간 전직 기자의 이주 생활과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탐구.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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