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왜 독일인은 목이 쉬면 내 말을 알아듣지?

나의 외국어 공부법 편력기, 들인 공에 비하면 너무나 느리게 늘면서 ‘공부법 덕후’가 됐네
등록 2023-01-27 09:12 수정 2023-02-03 00:52
일러스트레이션 구둘래

일러스트레이션 구둘래

4년 전 독일어를 처음 배웠을 무렵, 베를린에선 연극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모임이 유행했다. 몸으로 익힌 언어는 절대 잊지 않는다는 취지다. 나도 한 번 가봤는데 그날 우리는 가구 역할을 하나씩 맡아 열연했다. 선생님이 “왜 이렇게 어두워?” 하면 램프 역할을 맡은 학생이 전구처럼 머리 위에서 손을 동그랗게 마주 잡으며 “이히 빈 아이네 람페”(제가 램프예요)라고 외치며 무대로 들어선다. 나는 하필 의자 역할을 맡아 줄곧 네발로 엎드려 의자답게 말했다. “제츠 디히, 루에 디히 아우스, 이히 빈 아인 베크베머 슈툴.”(앉으세요. 좀 쉬세요. 나는 편안한 의자랍니다.)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

왜 독일어도 영어처럼 읽기만 느는 걸까

희한한 일이었다. 현지에서 외국어를 배우는데도 왜 한국에서 영어를 배울 때처럼 읽기만 느는 것일까. 19세기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은 10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나중에 독일 학교에서도 쓰인 슐리만 외국어 공부법은 “잘 쓴 글을 소리 내서 읽고 외워버리라”는 것이었다. 21세기에도 언어학자 스티븐 크라센이 “원서 읽기는 외국어를 배우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로 그 길을 넓혔다. 책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와 <스피드 리딩>을 읽고 원서 읽기에 나섰다. 처음 독일어 공부를 할 때는 원서 100권 읽기가 유행이었는데 요즘엔 1천 권은 읽어야 원어민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읽기 위주의 영어 공부법 때문에 우리가 실제 쓰이는 영어를 하지 못하는 거라는 반박도 만만치 않다. <나는 영어를 가르치는 시골 약사입니다>에서 저자는 영어와 한국어는 발성부터 다르다며 동네 아이들을 모아 원어민의 발성에 익숙해지고 따라 하도록 가르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키워낸 경험을 적었다. <데퍼리 송의 골반발성 영어>라는 책에서는 발성 위치를 바꾸라고 코치한다. 감기에 걸려 목이 팍 쉬어버릴 때 갑자기 독일 사람들이 내 말을 잘 알아듣는 것으로 봐서는 일리가 없지 않은 이야기인 듯한데 내 골반은 결국 소리를 내지 못했다.

영어 공부법에서 영화나 동영상 속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섀도잉(Shadowing)을 뺄 수는 없다. 책 <근데, 영화 한 편 씹어먹어봤니?> <9등급 꼴찌, 1년 만에 통역사 된 비법> 등에서 영화나 동영상을 하나 골라 100번을 듣고 보는 공부법을 소개하고 유튜브 채널에서는 100일 동안 영화 대사를 수없이 따라 하다 영어를 잘하게 되는 광경을 담은 동영상이 많다. 덕분에 쑥과 마늘만 먹고 동굴에서 버티는 마음으로 한 번만 들어도 우울한 독일 농담을 100번 들으며 섀도잉을 해본 적이 있다. 실은 요즘은 <영어책 10번만 읽으면 네이티브 된다>를 읽고 따라 하는 중이다.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사람들이 왜 자기계발서를 그리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내 독일어 실력은 들인 공에 비하면 너무나 느리게 늘었고 점점 ‘독일어 덕후’가 아닌 ‘공부법 덕후’가 됐다. 성과 없는 싸움에서 자신을 격려하는 유일한 재료가 공부법이었다.

20킬로 군장을 지고 산악훈련

비슷한 시기에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는 적어도 회화에서만은 유창하고 원어민과 많이 다르지 않은 발음을 구사했다. 나이 들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어학원에 있을 때면 늘 함께 외국어를 배우는 아이들보다 몇 배 무거운 군장을 지고 산악훈련을 받는 기분이었다.

언어학습엔 적기가 중요하다는 스위스 심리학자 장 피아제의 ‘결정적 시기’ 이론은 요즘 잘 인용되지 않지만 영어교육 관련 논문을 보면 어릴수록 학습 성과가 훨씬 높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중년 학습자는 처음에는 아주 빠른 속도로 문법과 단어를 익히지만 외국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진통한다.

미국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는 인간은 생물유전학적으로 언어구조를 인식하고 사회적 환경에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존재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인 문법 규칙을 자연스레 익히는 것은 모국어를 배울 때까지만 가능하다는 이론이 있다. ‘보편문법 이론’에선 나이가 들수록 문법이 가리키는 내용보다는 문법 자체를 공식처럼 외우니까 성인 학습자가 자연스레 원어민의 말 자체를 통째로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모니터 이론’이라는 것도 있다. 하지만 독일 언어학자 위르겐 크베츠는 성인은 어린이보다 개별 학습자의 차이가 훨씬 크다는 점을 지적하며, 나이는 사회적·심리적 요인처럼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다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그러니까 외국어 공부에선 모든 성인에게 공평한 성과가 약속되지 않고 똑같은 좌절도 없다.

쉬운 단어와 문장에 오래 머물고 싶다

수많은 공부법을 편력한 끝에 알게 된 것도 있다. 독일 학교에서 아이는 독일어와 영어는 물론 외국어를 하나 더 공부해야 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배운 지 3년이 됐는데 학교에선 줄곧 너무나 쉬운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그것만으로도 잘했다고 칭찬받는다. 초급에서 끝도 없이 시간을 보낸다. 나도 다른 한국인들처럼 고급단계 시험까지 급행열차를 탔는데 그러다보니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결정적 구간이 깔딱고개처럼 고통스러워졌다. 다른 외국어를 배운다면 쉬운 단어와 쉬운 문장에 되도록 오래 머물러 친해질 것 같다.

다른 외국어를 또 배운다고? 글쎄, 아마 그럴 것 같은데. 어느 날 갑자기 거리에서 독일어 간판들이 일제히 뜻을 가진 말로 눈에 꽂히던 날을 기억한다. 대충 듣던 토크쇼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갑자기 하나하나 들리면서 귀가 너무 시끄러워져 이어폰을 확 빼버린 때가 있었다. 아주 잠깐의 즐거움 때문에 긴 고통을 견디는 것, 틀림없이 중독이다.

베를린(독일)=남은주 자유기고가·번역가 eunjoonam@web.de

*공부하는 늙은 엄마: 나이 오십에 독일 대학에 들어간 전직 기자의 이주 생활과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탐구. 3주마다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