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광복절 복권 뒤 첫 공식 행보로 2022년 8월19일 경기도 용인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단지 기공식에 참석했다. 삼성전자는 2028년까지 20조원을 투입해 총 10만9천㎡(3만3천 평) 규모로 연구개발단지를 건설할 계획이다. 기흥 반도체 연구개발단지는 앞으로 시스템반도체와 메모리반도체의 핵심 분야 연구기지 구실을 한다.
기흥캠퍼스는 1983년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이 태동한 곳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이 부회장은 기공식에서 “40년 전 반도체 공장을 짓기 위해 첫 삽을 뜬 기흥사업장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차세대뿐만 아니라 차차세대 제품에 대한 과감한 연구개발 투자가 없었다면 오늘의 삼성 반도체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행사장에 설치된 대형 화면에는 이 부회장의 할아버지인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반도체 기술 개발을 강조한 말들도 소개됐다.
삼성전자의 발걸음이 분주해지는 이유는,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반도체 개발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미국은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뒤 본격적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중국이 첨단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주력한다. 이른바 ‘디지털 만리장성’을 세우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2년 8월9일(현지시각) 자국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of 2022)에 서명했다. 이 법은 미국 내 반도체 제조시설 신·증설에 보조금을 지원하고 투자금액의 25%를 세액공제 형태로 돌려주는 등 총 2800억달러(약 375조원)의 재정을 투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 남부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달러 규모의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에스케이(SK) 그룹은 반도체 분야 150억달러 투자를 비롯해 미국에 총 22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두 기업 모두 미국 정부의 인센티브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따로 있다. ‘반도체와 과학법’은 미국 정부의 인센티브를 받은 기업은 향후 10년간 중국 등 ‘요주의 국가’에 첨단 반도체 기술이 적용되는 시설을 추가로 지을 수 없도록 규정했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중국에 메모리반도체와 패키지(후공정)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추후 구체적인 규제 기준을 마련할 계획이다. 제재 수준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중국 공장에 첨단 설비를 도입하지 못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자사 낸드플래시 출하량의 40%를 중국에서 생산한다.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의 15%에 해당한다. 미국의 반도체 전문 매체 <세미애널리시스>의 수석분석가 딜런 파텔은 2022년 8월21일(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에 “미국의 대중국 수출 제한이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기업에 영향을 줘서 중국에서 생산 점유율이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히 감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반도체 제조 점유율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공장에서 생산 차질이 생기면 한국산 메모리를 공급받는 애플 등 주요 글로벌 기업들도 완제품 생산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 기업들의 반발이 예상돼 규제 강도가 세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미국이 제재 수위를 어느 수준으로 둘지가 관건이다. 시행령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고 미국 기업의 대응을 보면서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이 외에 한국과 일본, 대만과 함께 반도체 공급망 안정을 도모하려는 협의도 강화하고 있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은 2022년 8월3일 대만 방문에서 세계 최대 위탁생산 기업 티에스엠시(TSMC)의 류더인 회장과 만나 반도체 협력을 논의했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장비 분야에서, 한국은 메모리와 위탁생산, 대만은 위탁생산, 일본은 반도체용 소재와 장비 분야에서 강하다(상자기사 참조). 국내 언론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한국·일본·대만과의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를 두고 ‘칩(CHIP)4’ 또는 ‘팹(FAB)4’라는 용어로 부르는데 아직 미국의 구체적인 요구사항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각국이 협력관계이자 경쟁 상대이므로 첨단기술 교류보다는 당장의 공급망 불안 문제를 해결하려는 협의체 성격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한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반도체 업계가 글로벌 분업 체제에서 자국 중심 체제로 바뀌는 과정에 있는데, 미국은 반도체 국산화에 시간이 오래 걸리니 중간 과정으로 공급망 안정을 위해 이른바 칩4를 운영하는 것”이라며 “우리도 궁극적으로 자국화를 해야 하지만 우리가 취약한 소재·부품·장비 분야는 자국화가 어렵기 때문에 글로벌 분업 체제도 잘 유지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세계에서 주요한 반도체 수요국이자 한국의 주요 교역국이다. 2021년 한국의 반도체 수출 가운데 중국으로 수출한 비중은 39.7%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25.3%)보다 훨씬 크다. 대한상공회의소 자료를 보면 2000년에는 반도체 수출 가운데 중국으로 수출한 비중이 3.2%에 불과했다. 반도체 외에 정밀기기, 디스플레이 등 기술집약 산업의 중국 수출 비중도 늘었다. 대한상공회의소 쪽은 “국내 고부가가치 산업의 중국 의존도 증가는 중국과 기술 격차가 좁혀졌을 때 타격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라며 “기술혁신과 수출 다변화를 위해 기업과 정부가 온 힘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중국과 경제적으로 단단히 얽힌 한국 입장에선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 사이에서 핵심 이익을 지키기 위해 줄타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 미국이 반도체 지원법을 제정하고 중국을 배제한 인도·태평양 지역 경제협의체인 아이피이에프(IPEF)를 추진하자, 중국은 이런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022년 8월24일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식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한-중 관계가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더욱 성숙하고 건강한 관계로 나가기 위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국제 지역 형세가 어떻게 변하든 수교 초심을 지키자”고 말했다. 미국의 중국 견제에도 두 나라의 경제협력을 공고히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한국은 미-중 반도체 전쟁을 외교적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한편, 중국과의 기술 격차도 유지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반도체 원천기술이 부족한 중국은 2015년 ‘중국제조 2025’ 전략을 세워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70%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른바 ‘반도체 굴기(우뚝 솟음)’ 선언이다. 2020년 기준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15.9% 수준이어서 목표에 미치지 못한다. 중국은 2021년 3월 발표한 ‘제14차 5개년 계획 및 2035 중장기 목표’에서도 반도체를 전략 육성 분야로 선정하고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첨단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2019년 국가 반도체 기금이 290억달러 규모로 집행되기 시작했다.
중국계 사모펀드 ‘와이즈로드캐피털’은 2021년 한국 반도체 기업으로 나스닥에 상장된 ‘매그나칩반도체’를 인수하려 했다. 하지만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의 불허로 인수가 무산됐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은 2021년 낸 보고서(‘미·중 갈등과 중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 및 전망’)에서 “중국은 미국·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국인투자심사제도가 느슨한 한국 반도체 기업을 상대로 인수·합병 시도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정부가 관련 제도 강화를 신속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인 박재근 한양대 교수(융합전자공학부)는 “중국은 반도체 기술 개발을 정부가 주도하기 때문에 추격 속도가 빠르다. 메모리반도체는 중국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초격차 기술을 유지하고 우리가 취약한 소재·장비 부문도 글로벌 기업과 경쟁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반도체산업 현황
반도체는 크게 메모리반도체(정보저장)와 시스템반도체(정보처리)로 구분된다. 메모리반도체는 디(D)램과 낸드플래시가 대표적인데, 2022년 1분기 기준 디램은 한국의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시장의 70%를 점유해 미국의 마이크론과 함께 3강 체제를 형성했다. 낸드플래시는 삼성전자가 35%를 점유하고, 인텔의 낸드 사업부문을 인수한 SK하이닉스와 일본 기업 키옥시아가 2위를 다투고 있다.
시스템반도체는 전자기기 시스템을 제어·운용하는 반도체다. 스마트폰이나 웨어러블 기기, 자동차, 드론 등 다양한 기기에 맞게 설계돼야 하므로 종류가 다양하고 한 기업이 다 맡아서 만들기도 어렵다. 시스템반도체 공정은 크게 설계만 담당하는 팹리스(Fabless) → 수탁 제조를 전문으로 하는 파운드리(Foundry)→ 패키징 및 검사를 하는 후공정(ATP) 단계로 나뉜다. 단계별로 글로벌 분업화가 가장 발달돼 있다.
대표적인 팹리스 기업은 미국의 엔비디아, 에이엠디(AMD), 퀄컴, 애플이 있다. 중국 기업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도 설계 전문 기업이다. 팹리스 기업한테서 제조를 위탁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은 대만의 티에스엠시(TSMC)가 대표적이다. 설계부터 완제품 제조와 판매까지 자체 수행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으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미국 인텔이 있다.
인공지능 개발 등으로 반도체 설계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첨단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초미세 제조 공정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2022년 1분기)은 대만 TSMC가 54%, 삼성전자가 16%를 차지한다. 삼성전자는 2022년 6월 세계 최초로 3나노 공정을 적용한 제품 양산 시작을 발표했다. 1나노미터(nm)는 10억분의 1m인데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 정도 되는 길이다. 3나노는 반도체에 그릴 수 있는 전기회로의 선폭이 3나노미터라는 뜻이다. TSMC도 2022년 9월부터 3나노 공정으로 애플의 엠(M)2 칩을 생산한다고 8월22일 대만 언론이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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