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짐짓 비장하다. 주재원 발령으로 처음 아프리카 땅을 밟았을 때와 다른…. 운명을 건 남극점 탐험을 시작한 스콧 대령의 심정에 비할 바겠느냐마는 코로나19로 인한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봉쇄령의 시작은 두려움 자체였다.
당연히 재택근무이며 등교 금지와 함께 술·담배도 판매가 금지됐다. 경찰과 군인까지 동원해 통행금지를 챙긴단다. 3월27일 국가봉쇄령이 내려질 즈음, 마트에 생필품이 동나면서 강도 사건과 상점들이 털리는 영상을 심심찮게 목격했다.
무엇보다 생필품을 사러 갈 때 나를 보는 불편한 시선이 싫었다. 원인유발자(중국인)에 대한 증오이겠지만 한국인인 나는 적잖이 억울했다. 마트 진열대 코너를 돌다 부닥친 흑인 아저씨의 소스라치던 뒷걸음질과 전방의 나를 보자마자 자녀들의 마스크를 추스르던 백인 아주머니의 재빠른 손놀림이 떠오를 때면 지금도 허공에 발길질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다. 인종차별의 역사를 박제해 전시하는 이들이 교묘하게 인종차별 기술을 선보일 줄이야.
그렇게 야단법석으로 맞이한 국가봉쇄령 첫날은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러웠으나 차차 익숙해져갔다. 마당에 텐트를 치고 가족과 매일같이 소풍하듯 식사를 하고 있자니 오랜 주말부부 생활에 대한 보상처럼 여겨졌다. ‘가족과 같이 보낸 시간 경진대회’가 있다면 내가 1등이다.
하지만 집에 갇힌 시간이 계속되니 슬슬 지쳐갔다. 서로에게 잔소리와 무관심이 동시에 늘어갔다. 출퇴근과 등하교 시간이 없으니 모두가 영화 <인터스텔라>의 초현실 공간에 있는 것처럼 무기력해지면서 생활 관리가 되질 않았다. 이 와중에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순환단전이 계속됐다. 정전되면서 단수도 자주 됐다. 엎친 데 덮쳤다는 말이다.
4월28일, 집에 와인이 떨어졌다. 병당 3천원꼴로 저렴해 저녁 식사에 반주로 안성맞춤이던 작은 즐거움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지난해(2019년)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의 산과 해변, 사파리, 와인 농장까지 말 그대로 이곳저곳을 훑고 다녔다. 아이들이 학원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완됐다. 무심한 코로나 때문에 돌아다닐 수도 없게 되니 속절없이 시간만 지나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답답한 마음에 프로야구단에서 근무하는 동서에게 하소연을 겸한 안부 전화를 했다. 서로 소식을 나누다 현역 시절에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은 아이러니하게 공이 크게 보여 잘 쳤다는 동서의 이야기가 뇌리에 맴돌았다.
소득 없이 시간만 지나간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가 있을까. 속도가 늦춰지니 주변이 선명히 보인다. 모두가 모여 있는 덕분에 가족이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상당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혼란한 시절에도 하루하루 건강히 생활할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하게 된다.
간밤에 내린 장대비에 마당 장미꽃들 고개가 꺾였다. 상심한 마음에 장미꽃을 수습해 화병에 꽂았다. 오래 볼 순 없겠지만 가까이 두고 볼 수 있으니 손해 난 장사는 아니다. 백신 이야기가 들려오니 내년을 기대해본다. 지난여름 다녀왔던 케이프타운과 희망봉에 다시 갈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오늘을 열심히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희망이 가득하길.
요하네스버그(남아프리카공화국)=이권철 한국전력 남아공지사 차장
*<한겨레21>은 통권 제1315·1316호 표지이야기 ‘코로나 뉴노멀’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상황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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