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명. 한국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며 매주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이는 시민들의 수이지만, 지난 12월6일 인도 타밀나두주의 주도 첸나이에서 사랑했던 정치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추모하기 위해 모인 시민의 수이기도 하다. ‘암마’(Amma·엄마라는 뜻의 힌디어)이자 ‘철의 여인’으로 불린 자야람 자얄랄리타(Jayaram Jayalalithaa) 타밀나두주 총리가 12월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8.
타밀나두주 당국은 열혈 지지자들의 소요 사태에 대비해 시내에 경찰 6천여 명을 배치하고 휴교령을 내렸다.
16살에 배우 데뷔, 영화 150여 편 출연인기 배우 출신 자얄랄리타는 남성 중심의 인도 사회에서 타밀나두주 총리를 5차례 지냈다. 부정부패, 신격화, 금권정치 논란 등에도 그는 인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정치인으로서 전례 없는 길을 걸어오며 추종받았다. 인구 7천만 명의 타밀나두는 인도 28개 주 가운데 한 곳으로 남부에 있다.
자얄랄리타는 평범한 시민뿐만 아니라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숭배에 가까운 헌신을 받았다. 2014년 자얄랄리타가 부정부패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을 때 거리에서 지지자들이 그의 무죄를 주장하며 며칠간 폭동을 일으켰다. 일부는 제 몸에 불을 질러 목숨을 끊었다.
당시 첸나이 거리에는 자얄랄리타의 얼굴 위에 “어떻게 사람이 신을 벌줄 수 있는가?”라고 쓰인 거대한 포스터가 나붙었다. 1992년 자얄랄리타가 쿰브멜라 축제의 일환으로 목욕 의식을 행했을 때 이를 보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50여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1961년 16살에 영화배우로 데뷔한 자얄랄리타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큰 인기를 누리며 1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타밀나두주 최초로 치마를 입고 출연한 여배우이기도 하다. 자얄랄리타의 전기 작가 바산티 선다람은 영국 일간지 과의 인터뷰에서 “남성 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타밀나두 정계는 자얄랄리타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했지만 그는 수그러들지 않고 맞섰다”고 말했다.
1982년 자얄랄리타는 동료 배우이자 조언자인 MG 라마찬드란이 만든 ‘전인도 안나드라비다 진보연맹’(AIADMK·All India Anna Dravida Munnetra Kazhagam)에 가입했다. 이후 타밀나두주 총리가 된 라마찬드란이 1987년 사망하고 당이 분열 위기에 놓였을 때 위기를 돌파해 당을 존속시킨 이가 자얄랄리타였다. 그는 만장일치로 리더로 인정받았다. 당시 타밀나두의 첫 번째 여성 야당 대표였던 자얄랄리타는 의회에서 상대 정당의 하원의원에게 공격받아 옷이 찢긴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여성이 의회 회의에 안전하게 참석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때까지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1991년 자얄랄리타의 당은 타밀나두 의회 234석 중 225석을 차지하는 엄청난 승리를 거뒀다. 그는 타밀나두의 첫 여성 총리로서 임기를 다했으며 5선까지 성공했다. 2014년 부정축재로 유죄선고를 받아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이듬해 무죄로 판결이 뒤집어지고 2016년 5월 19대 선거에서 다시 총리가 돼 저력을 과시했다.
1991년 총리 취임 뒤 5년간 재산 20배 증가정치적 성공과 함께 부패 스캔들은 내내 자얄랄리타를 따라다녔다. 그는 1991년 첫 총리 취임 당시 월급을 1루피만 받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자얄랄리타의 재산은 취임 당시 3천만루피에서 5년 만에 6억6500만루피(약 113억원)로 20배 넘게 불어났다. 늘어난 재산의 대부분은 다이아몬드와 귀금속이었고 신발 750켤레, 사리 1만 벌, 토지소유권 78개가 포함돼 있었다. 그는 양아들의 결혼식을 해안가에서 호화스럽게 치르며 1만2800여 명에게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자얄랄리타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필리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에 비견됐다. 자얄랄리타는 1996년 부패방지법 위반으로 기소된 뒤 18년 동안 재판해 2014년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 4년, 벌금 10억루피(약 170억원)를 선고받았다. 2015년 고등법원은 ‘증거 부족’이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자얄랄리타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멈추지 않았다. 자얄랄리타의 장례식에 나온 한 트랜스젠더 여성은 과의 인터뷰에서 “신 앞에서 무릎 꿇지 않을 건가요? ‘암마’는 우리의 신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트랜스젠더 커뮤니티)가 작은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대출을 도왔고 건강보험과 식량 배급 카드를 줬어요.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요, 아무도 우리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인도의 유력 영자 일간지 는 “많은 사람이 자얄랄리타가 대중에게 반신반인처럼 여겨져온 게 배우로서의 인기, 강인한 성격 때문이라 말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 없이 대중의 애정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인도는 복지국가와 거리가 멀지만 대담한 복지정책을 선도한 곳이 있다면 타밀나두다.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는 정책은 언제나 타밀나두 정치의 일부였고 그것은 자얄랄리타의 ‘암마’ 배너 아래서 강한 힘을 받았다.”
“대담한 복지정책 선도”자얄랄리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결혼 예물과 저렴한 식사, 생수, 약, 씨앗을 제공했고 믹서와 그라인더까지 주었다. 컴퓨터, 시멘트, 의료보험도 제공했다. 이 모든 것에는 그의 애칭 ‘암마’가 붙었다. 복지정책에 자신을 브랜드로 사용하는 게 자얄랄리타의 주요 전략이었다. 자얄랄리타는 대안 에너지와 빗물 저장 기법 관련 정책을 진작했고, 부모가 익명으로 여자아이를 맡길 수 있는 보호센터를 만들어 영아 살해율을 줄이는 데 일조했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자얄랄리타에 대해 “지지자들은 그가 타밀나두주를 인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곳으로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다”고 평가한다. 반면 자얄랄리타가 시스템을 멋대로 조종한 부패 정치인일 뿐이며 그 자신이 법보다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비판도 있다고 보도했다.
자얄랄리타는 명성과 악명, 숭배와 비판의 정점에서 동시에 살았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인생을 ‘폭풍우 같은 삶’이라고 묘사했다. “어떤 때건 나는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생각하기를 멈춰본 적이 없어요. 내가 이걸 해야 한다고 느꼈고 그래서 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느끼는 건 뭐든지 했어요.”(한 텔레비전 인터뷰)
김여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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