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80살이 다 되었지만, 지금도 내 목표는 한결같다. 광대가 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광대를 꿈꾼다. 완벽한 광대, 순진무구한 아이 같은 광대 말이다. 그저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당신의 마음은 움직일 것이다.”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 마임배우 ‘광대’ 디미트리(Clown Dimitri)는 2015년 미국에서 발간된 책 (에즈라 르뱅크, 데이비드 브리델 지음)에 담긴 말년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미 광대였지만, 죽기 직전까지 진정한 광대가 되기를 소망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목표는 ‘완벽한’ 광대</font></font>스위스를 대표하는 광대, 마임이스트이자 곡예사, 음악가, 도예가, 화가 등 종합예술가이던 20세기의 ‘광대’ 디미트리가 지난 7월19일 스위스 남부 티치노주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 디미트리 재단 쪽은 그가 지병을 앓지는 않았으며,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금 세대에게 피에로 분장을 하고 무언극을 하는 광대는 잊힌 유물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분칠하고 무대에 올라, 몸으로 시를 쓰며 사람들을 울고 웃기는 많은 광대가 있다. 디미트리는 그중에서도 ‘현대 마임’ 하면 곧장 이름을 떠올릴 20세기 마임의 대가들에게 젖줄을 댄 운 좋은 광대였다. 그는 찰리 채플린 이후 최고의 마임배우로 알려진 프랑스의 마임 아티스트 마르셀 마르소의 제자였고, 마르소 이전 현대 마임을 체계화했다는 평가를 받는 에티엔 드크루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디미트리는 신체의 단순한 움직임에서 극단의 예술성을 끌어내는 ‘마임이스트’라기보다 마임을 비롯해 미술, 음악, 연극 등을 통합한 ‘광대’에 더 가까웠다. 그는 1959년 자신이 만든 첫 일인극 (Porteur)를 시작한 이래 50여 년간 한결같은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는 무대장치 없이 한두 가지의 소품으로만 이뤄지는 실내 일인 무언극을 주로 했다. 언제나 특유의 바가지 머리에 흰 얼굴과 검은 눈물의 광대 분장을 했으며, 주로 서커스 곡예 기술과 다양한 악기 연주 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웃겼다. 그는 고향 근처 마을 베르치오에 자신의 이름을 딴 극장과 학교, 박물관을 세워 ‘광대의 소왕국’을 만들고, 죽기 며칠 전까지도 반세기 전 모습 그대로 이곳 극장 무대에 올랐다. 200석 규모의 작은 극장은 세계 곳곳에서 그의 고집스러운 유머를 보러 온 사람들로 늘 붐볐다.
디미트리 야코프 뮐러는 1935년 9월18일 스위스 아스코나에서 태어났다. 조각가인 아버지와 수공예가인 어머니는 지역 예술계의 유명 인사였다. 그는 7살 때 서커스를 처음 보고 광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광대를 위한 학교 같은 것은 물론 없었다(지금은 있다). 대신 어릴 적 그는 발레, 곡예, 연기, 플라멩코 기타, 마임, 포크댄스, 체조 등의 기본기를 배웠다. 취리히에서 일종의 대안학교인 루돌프슈타이너스쿨을 졸업한 뒤, 도예가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도예를 익혔다. 그의 목표는 “광대가 되기 위해 다양한 것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배워두자”()는 것이었다.
그는 친구들의 생일 등 파티가 있을 때마다 작은 촌극을 만들어 공연했다. 이때 ‘발명’한 것이 표정과 동작만으로 이뤄진 팬터마임 촌극이었다. “마임 공연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말과 소품 없이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마임’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언어 없이도 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개념 자체에 매혹됐다. 그래서 ‘그럼 그걸 한번 해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마르소에게 마임을 배우다</font></font>이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그는 현대의 ‘양식적 팬터마임’을 확립한 프랑스의 마임배우 에티엔 드크루 밑에서 마임을 공부했다. 그리고 23살이던 1958년, 드디어 20세기 현대 마임계의 우상으로 여겨지던 마르셀 마르소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마르소의 수업을 들었고, 나중에 그의 극단에 합류했다. 당시 마르소가 기획하던 공연 에 그와 같은 곡예사가 꼭 필요하다며 마르소가 참여를 제안했다.
그는 마르소와 함께 공연할 때마다 무대 뒤에서 그의 연기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천재의 비밀을 알아내고 싶었다. 마르소는 어떤 소품도, 말도 없이 단순명쾌한 움직임만으로 관객을 웃게 했다. 그는 마르소의 공연을 보며 매번 큰 충격과 영감을 받았다.
함께 공연한 지 1년 정도 지난 뒤 마르소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네가 마임을 배운다고 내게 왔지만, 나는 네가 광대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 솔직히 말하면, 너는 위대한 마임이스트는 절대 될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아주 훌륭한 광대는 될 수 있어.”()
디미트리는 이후 파리의 메드라노 서커스단과 함께 ‘오귀스트’(‘피에로’나 ‘할리퀸’처럼 전설적 광대 캐릭터 중 하나)로 공연했다. 이윽고 1959년, 자신이 만든 첫 솔로 공연 를 고향인 스위스 아스코나에서 무대에 올렸다. 공연은 좋은 반응을 얻었고, 그는 곧 세계 투어에 나서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까지 그는 파리의 가장 유명한 극장들에서 공연했다. 1960~70년대엔 세계적인 서커스단 ‘스위스 크니 서커스’의 투어에도 참여했다. 첫 쇼에서 그는 코끼리와 파트너로 공연했고 나중에는 소, 돼지, 당나귀와 공연하기도 했다.
디미트리는 마르소와 함께 스위스 출신의 유명 광대 ‘그록’을 자신의 영웅이라고 말했다. 그는 17살 때 처음 본 그록의 공연에 대해 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서커스에는 저글러, 가수, 곡예사, 코미디언은 있었지만 동물이 없었다. 공중그네도 없었다. 그때가 1952년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 그록은 많은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악기를 이용한 무언극을 많이 했다. 또한 디미트리의 말에 따르면 그록은 “질적으로 아이 같은 순수함과 자기 몸을 통제하는 명민함을 동시에 지닌”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개성을 가진 광대였다.
디미트리의 공연 스타일을 보면 그가 마르소와 그록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록처럼 순진무구한 유머를 추구했고, 다양한 악기를 연기에 사용했다. 그는 마르소처럼 시적인 움직임을 취하기 원했고, 그처럼 일인극을 하려 했다. 단, ‘마임이스트’가 아니라 ‘광대’로서. 그는 스스로를 “사실상 일인극을 한 첫 광대”로 칭하곤 했다.
그 사이, 1961년 그는 어릴 적 연인 군다와 결혼했다. 1971년에는 군다와 함께 고향 근처 시골 마을인 스위스 베르치오에 ‘디미트리 극장’을 설립했다. 1975년 신체극 전반을 가르치는 ‘디미트리 연극학교’를, 2000년에는 박물관을 세웠다. 그가 어릴 때만 해도 극장 하나 없던 시골 마을은 이제 광대와 마임을 사랑하는 전세계 사람들이 방문하는 장소가 되었다.
오랫동안 솔로 공연을 해온 디미트리는 2006년 딸인 마샤와 니나, 아들 데이비드 등과 함께 이라는 공연을 만들었다. 이 공연은 사이클링, 노래, 줄타기 등이 포함된 가족 친화적인 공연으로 2008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디미트리는 2009년 스위스 문화상과 2013년 스위스 공로상을 받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광대는 죽지 않아</font></font>80살 생일을 기념해 진행한 와의 인터뷰에서 디미트리는 지난 50여 년간 매일 3시간씩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중제비, 물구나무서기, 악기 연습 등 광대로서의 훈련을 해왔다고 말했다. 덕분에 그는 말년에도 1년에 150회가량 진행된 공연을 소화했다.
그의 죽음을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는 죽기 사흘 전인 7월16일 새로 론칭한 야외극의 프리미어 공연을 치렀고, 바로 전날인 18일에도 자신의 극장에서 가족과의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무엇보다 시적인 얼굴로 조명 아래에 서는 광대는 ‘초월적인 명랑한 정신’ ‘불멸’의 존재가 아니었던가? 지난해 한 방송에 등장한 그는 79살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유연하고 탄력 있는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내 몸과 마음은 모두 여전히 젊다. 광대는 불멸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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