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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으로 출근한 노동운동가

1950~60년대 열악했던 미국 농업 이주노동자 처우 개선 위해 ‘전국농업노동자연합’ 창설해 노동자 기본권 폭넓게 인정한 법 이끌어낸 멕시코계 농업노동자 헬렌 파벨라 차베스
등록 2016-06-23 16:23 수정 2020-05-03 04:28

‘fsa 8b29516.’
미국 의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디지털 자료 분류번호다. 검색창에 타자를 치고 따라가보면, 낯익은 흑백사진을 만날 수 있다. 신산스런 표정의 중년으로 보이는 여성이 오른손으로 턱을 받친 채 저만치를 바라보고 있다. 남루한 차림을 한 커트 머리 두 아이가 여성의 양편에 머리를 박고 반나마 돌아서 있다. 여성의 무릎에는 땟국에 전 아기가 잠들어 있다. 사진 오른쪽 구석에 버팀목이 흐릿하게 보인다. 뒤편은 천으로 둘러쳐져 있다. 천막 안에 있는 게다.
자재 취급 받았던 대농장의 이주노동자

AP연합뉴스

AP연합뉴스

뉴딜 정책 시절 미국 농업안정국(FSA)에 소속돼 활동했던 사진가 도로시아 랭은 이 사진으로 전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의회도서관은 촬영 일시를 ‘1936년 2월 혹은 3월’로 밝히고 있다. 제목란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콩 수확 노동을 하는 가난한 32살 어머니’라고 적혀 있다. 촬영 장소는 ‘캘리포니아주 니포모’다. 사진에 등장한 여성의 이름은 플로렌스 톰슨, 이른바 ‘이주노동자 어머니’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사진은 대공황과 ‘더스트볼’(미 중부 지역을 휩쓴 모래바람을 동반한 대가뭄)이 덮친 1930년대 미 중서부 노동계급이 처한 현실을 극명히 보여준다. 작가 존 스타인벡이 (1939년작)에서 담아낸 것도 이 시절이다. 농산물 수확철에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일감을 찾는 농업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이 나아진 것은 그 뒤로도 한참 시간이 흘러서다.

헬렌 파벨라 차베스는 1928년 1월21일 캘리포니아주의 임페리얼 계곡 자락에 위치한 브롤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대 멕시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미국으로 각각 이주해온 그의 부모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 결혼해 그곳에 정착했다. 아버지 비달 파벨라는 멕시코혁명 지도자 프란치스코 판초 빌라의 휘하에서 한동안 부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단다.

차베스가 처음 노동을 경험한 것은 7살 무렵이다. 샌와킨계곡 자락의 델라노에 정착한 부모가 농업노동자였던 탓에, 자연스레 들판에서 일손을 거들었다. 봄에는 콩과 체리를 거둔다. 여름 작물은 옥수수와 포도다. 가을엔 면화를 따고, 겨울엔 완두콩과 쌈채소를 수확했다. 일찌감치 노동의 고담함을 깨달은 그는 학교에서 우등생으로 커나갔다.

차베스가 고교 2학년을 중퇴한 것은 1933년의 일이다. 그해에 아버지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혼자 4남3녀를 먹이고 입힐 순 없었다. 차베스는 장녀였다. 처음엔 동네 식료품점에서 일했다. 하지만 곧 부모의 길을 따라 농업 이주노동자의 길로 들어섰다. 고된 노동에서 풀려나는 토요일이면 10대 소녀는 마을 멕시코계 주민회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밤늦도록 지르박을 췄다. 그 무렵 어울리던 친구 가운데 리처드 차베스도 있었다. 훗날 남편이 되는 세자르 차베스의 동생이다.

역시 고교를 중퇴하고 이주노동자로 생활하던 세자르 차베스는 1944년 해군에 입대해 2년을 복무했다. 헬렌 파벨라와 세자르 차베스는 2년여 열애 끝에 1948년 10월22일 결혼했다. 헬렌 파벨라 차베스의 나이 20살 때다. 그는 결혼 뒤에도 변함없이 농업노동자로 일하며 친정 식구들을 건사했다.

워싱턴에 있는 라틴아메리카 전문 싱크탱크인 ‘미주문제위원회’(COHA)가 6월13일 펴낸 자료를 보면, 20세기 초반부터 미 남서부 일대의 농업 생산은 멕시코계 이주노동자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률이 치솟으면서, 미 정부는 자국민의 일자리 마련을 위해 멕시코계 이주민을 대거 돌려보낸다. 미 정부의 정책이 다시 급선회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다.

전시 물자 공급을 위해 농업 생산량을 대폭 늘려야 했던 미 정부는 멕시코계 이주노동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1942년 이른바 ‘브라세로(손노동)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1964년 이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줄잡아 460만 명 이상의 멕시코 이주민이 노동 허가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가뜩이나 열악했던 농업노동자의 처우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COHA는 보고서에서 “대농장주들은 이주노동자를 최대한 싼값에 구해야 하는 일종의 자재처럼 여겼다”고 짚었다.

“노동조합이잖아요, 우리!”

1930년대 중반 이후 미국 노동권은 전반적으로 크게 나아졌다. 노사관계법(1935년)과 근로기준법(1938년)이 잇따라 입법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가 대폭 강화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업 이주노동자는 예외였다. 법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이들의 처우는 갈수록 열악해지기만 했다. 1952년부터 라틴계 이주민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던 세자르 차베스가 점차 이주노동자 조직화 쪽에 눈을 돌린 것도 이 때문이다. 부부는 1962년 전국농업노동자연합(NFWA)을 창설하고 권리를 위한 투쟁을 본격화했다.

‘라 카우사.’ 투쟁의 목표는 분명했다. ‘임금 인상, 노동환경 개선, 그리고 더 밝은 미래를 위해.’ 인권단체에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으며, 중산층 거주지인 이스트 로스앤젤레스에서 생활하던 부부는 NFWA 창설과 함께 델라노로 복귀했다. 세자르 차베스가 조합원 모집을 위해 길을 나서면, 헬렌 차베스는 농장으로 출근했다. 2007년 작가 자크 레비가 펴낸 남편의 평전에서, 헬렌 차베스는 그 무렵을 이렇게 회고했다.

“남편이 출장 길에 오르면, 나는 농장으로 나가 닥치는 대로 일감을 찾았다. 하루 10시간, 주 5일을 일했다. 당시 임금은 시급 85센트였다. 노동조합 창립 초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다.”

분노의 나날이었다. 조금씩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65년 9월 포도 수확이 한창인 들녘에서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았다. 이른바 ‘델라노 포도 파업’이다. 파업을 선두에서 이끈 건 필립 베라크루스가 이끄는 필리핀계 이주노동자 단체였다. 파업 동참 여부를 두고 NFWA 내부에서 논쟁이 가열됐다. 남편의 뒤편에서 묵묵히 궂은일을 도맡아온 헬렌 차베스가 이례적으로 입을 열었다. “노동조합이잖아요, 우리!”

NFWA가 가담하면서 파업 대오는 갈수록 불어났다. 2천 명 넘는 노동자가 파업에 합류했다. 쉽게 끝을 볼 수 있는 투쟁이 아니었다. 파업 2년차인 1966년 3월17일 세자르 차베스는 델라노에서 캘리포리아주 주도인 새크라멘토까지 ‘300마일(약 482km) 순례’에 나섰다. 농업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알리는 한편, 주정부의 중재를 압박하기 위해서다. 그해 8월 파업을 주도했던 필리핀계 단체와 멕시코계 단체는 하나로 합쳐진다. 조합원 1만 명을 자랑하는 미국농업노동자연합(UFW)은 그렇게 탄생했다.

포도 수확철마다 파업은 이어졌다. 1968년부터는 포도 불매운동이 본격화했다. 미 전역에서 1700만 명가량이 불매운동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이주노동자의 단결권과 교섭권을 폭넓게 인정한 ‘농장 노사 관계법’이 통과된 것은 1975년의 일이다.

조합원·활동가 거두어 먹여

이후에도 헬렌 차베스는 남편의 그림자가 돼 노동운동을 지속했다. 단체의 자금을 관리했고, 팻말 시위를 조직했고, 체포되기를 반복했다. 짬이 날 때마다 들판에 나가 농업노동자와 함께 일하며 투쟁을 벼렸다. 셀 수 없이 많은 노동조합 행사에 음식을 해서 날랐다. 결혼식과 장례식, 추수감사절과 성탄절마다 조합원과 활동가를 거두어 먹였다. 그러면서도 8남매를 든든하게 키워냈다. 여느 이주노동자 가정의 여성과 마찬가지다.

세자르 차베스는 1993년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숨진 뒤에도 헬렌 차베스의 ‘조용한 활동’은 이어졌다. 2013년 남편의 20주기를 맞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묘역을 찾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님, 이민법 개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해주시겠어요?” 헬렌 차베스는 지난 6월6일 캘리포니아주 베이커스필드의 샌와킨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향년 88. 장례식은 6월13일 마을 성당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흰옷을 입은 농업 이주노동자 6명이 그의 주검을 운구했다.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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