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상대적이다. 최고의 순간도, 최악의 순간도 기억된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는, 들여다보는 이들의 선택에 달렸다. 삶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은퇴한 독재자가 쓰러진 것은 2006년 12월3일이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16년6개월간 철권을 휘둘렀던 칠레의 독재자를 쓰러뜨린 건 심장마비였다. 법원은 이튿날 피노체트의 가택연금을 해제했다. 일주일 뒤인 12월10일 오후 1시30분께 피노체트는 육군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는 1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만 91살이었다.
그해 12월12일 라스콘데스의 육군사관학교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지지자 등 6만여 명이 몰렸다. 칠레 정부는 ‘국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육군참모총장 경력을 인정해 ‘군장’으로 치르는 것은 허용했다. 피노체트를 참모총장에 발탁한 것은 살바도르 아옌데였다. 1973년 9월11일 아침 피노체트의 명을 받은 전투기가 아옌데의 집무실인 라모네다 대통령궁을 폭격했다. 그 시절의 기억이다.
파트리시오 아일윈 아소카르(사진)는 1918년 11월26일 칠레 중부 발파라이소 동북부 비냐델마르에서 태어났다. ‘바다의 포도원’이란 뜻이다. 이름만큼 부유층의 휴양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아버지 미구엘 아일윈은 대법원장을 지냈다. 유복한 가정의 영민한 맏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충실히 따랐다. 칠레국립대 법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아일윈은 1943년 변호사가 됐다. 모교 등지에서 행정법 교수로도 활약하던 그는 자연스레 정치권으로 향했다.
보수정당 2인자로 순탄한 성장1945년 기독교 보수 정치단체인 ‘팔랑헤 나시오날’에서 활동을 시작한 아일윈은 5년 만에 대표로 선출됐다. 이 단체는 1957년 중도 성향의 사회기독보수당(PCSC)과 통합한다. 그렇게 탄생한 게 칠레 기독민주당이다. 아일윈은 창당 이후 1989년까지 모두 7차례 당대표를 지냈다. 그의 정치 인생은 1965년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기독민주당 소속 에두아르도 프레이가 집권한 직후다.
1970년 9월4일 사회당 소속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선에서 승리했다. 기독민주당은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 정부가 출범하기 전부터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그 맨 앞에 아옌데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프레이가 서 있었다. 그 바로 뒤에 아일윈이 있었다. 1971년 상원의장에 오른 아일윈은 사사건건 인민연합 정부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미국이란 든든한 배후의 비호 아래, 칠레 우파는 파죽지세로 움직였다. 1972년 1월 좌파에 반대하는 제 정파가 연대체제를 구축했다. 2월엔 국민당과 기독민주당이 보궐선거에서 연합전선을 펼쳤다. 3월엔 재계와 법조계, 종교계가 보수정당 주도의 반정부 움직임에 노골적으로 가세했다. 4월엔 이른바 ‘민주주의를 위한 행진’을 명분으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당시 아일윈은 “우리의 권리를 행사하는 데 추호의 양보도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곧 자본 파업이 이어졌고, 생필품 부족 사태가 본격화했다. 정부는 사실상 마비 상태로 내몰렸다.
기독민주당과 연대 없이는 정국을 타개할 방도가 없었다. 아옌데는 기독민주당을 포괄하는 대연정을 추진했다. 1973년 5월 아일윈이 다시 기독민주당 대표로 선출됐다. 아옌데는 교회 지도자인 라울 실바 엔리케스 추기경을 통해 접촉을 시도했다. 추기경의 압력에 밀린 아일윈도 회담에 응했다. 1973년 7월과 8월 두 차례 회담이 이뤄졌다. 아일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칠레 상원은 9월 들어 군부에 “법질서를 바로 세우라”는 요청을 담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사실상 쿠데타를 촉구한 게다. 기독민주당은 그해 9월10일 아옌데의 연정 참여 제안을 최종 거부했다. 피노체트는 이튿날 새벽 바로 움직였다.
쿠데타 일주일 뒤인 1973년 9월18일, 군부는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독립기념일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프레이 전 대통령을 비롯한 기독민주당 지도부가 이 자리에 참석했다. 사실상 군부의 정통성을 인정해준 셈이다. 10월엔 아일윈이 당대표 자격으로 군부와 만났다. 당시 회담에서 오간 대화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상황을 고려하면, 후안 가르세스를 비롯한 아옌데 정부 인사들이 남긴 증언에 무게감이 실린다.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군부 집권에 힘 실어준 순진함‘당시 면담에서 아일윈은 쿠데타에 대한 지지 의사를 재차 밝혔다. 이어 향후 정국 운영에 기독민주당이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때까지도 아일윈은 정국이 안정되면, 군부가 자신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순순히 물러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일윈은 순진했다. 군은 부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의회는 해산됐다. 탄압의 광풍이 거리를 꽁꽁 얼렸다. 정국을 한 손아귀에 거머쥔 피노체트는 헌법에 손을 댔다. 1980년 그예 개헌이 이뤄졌다. 피노체트는 임기를 1990년까지 보장받았다. 또 1997년까지 한 차례 임기 연장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기독민주당은 그제야 반군부로 돌아섰다.
1982년 1월22일 프레이가 돌연 숨졌다. 피노체트의 비밀경찰(DINA)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해졌다. 아일윈은 반군부 진영의 구심점이 돼갔다. 흉포한 군부에 대한 반감이 퍼지고 있었다. 1986년 9월엔 피노체트를 겨냥한 암살 시도까지 벌어졌다. 미국도 서서히 발을 빼기 시작했다. 피노체트는 재신임 카드를 꺼내들었다. 1988년 10월5일 피노체트의 임기를 1997년까지 연장하는 것을 두고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아일윈은 반대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유권자 53.5%가 피노체트의 연임에 반대했다. 긴 겨울이 다 가고 있었다.
17개 중도·좌파 정당의 무지갯빛 연대체인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연합’(콘세르타시온)이 결성됐다. 이듬해 12월14일 치러진 대선에서 콘세르타시온의 후보로 나선 아일윈은 무난히 당선됐다. 군부독재의 긴 터널을 지나온 칠레의 첫 번째 민선 대통령으로 선출된 게다. 노회한 피노체트는 안전장치를 마련해뒀다. 1980년 헌법의 틀을 흔들 수 없도록 하는 한편, 퇴임 뒤 8년 동안 자신이 육군참모총장직을 유지하도록 못박았다. 또 종신직 상원의원으로서 면책특권도 확보해뒀다.
1990년 3월 집권한 아일윈은 한 달여 뒤인 그해 4월25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위원장 라울 레티그)를 설치했다. 군부독재 아래서 자행된 인권유린 실태 조사와 희생자 보상, 재발 방지를 위한 법적 조치를 마련하는 게 위원회의 임무였다. 한계는 명확했다. 노회한 독재 부역자들은 위원회의 활동을 교묘하게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이듬해 2월8일 발표된 ‘레티그 보고서’에는 실종자를 포함한 희생자 3200여 명과 불법 구금·고문 등 피해자에 대한 기록이 빼곡하게 담겼다. 보고서 발표에 맞춰 아일윈은 방송연설을 통해 정부를 대표해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용서를 구하며 울먹였다.
콘세르타시온은 거푸 20년을 집권했다. 그 마지막 4년 임기는 2006년 3월11일 취임한 사회당 소속 미첼 바첼레트의 몫이었다. 공군 장성으로 끝까지 아옌데 정부에 충직했던 바첼레트 대통령의 부친은 1973년 쿠데타 직후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숨졌다. 당시 학생운동가였던 바첼레트 대통령 역시 고문을 당하고 투옥됐다. 집권 첫해의 끝자락에 피노체트가 숨지자, 바첼레트 대통령은 “내 의식에 반한다”는 이유로 장례식에 불참했다.
대통령 되자 독재 희생자에 용서 구해2006년 12월12일 장례를 마친 피노체트의 주검은 파르케델마르 공동묘지에 딸린 화장장에서 화장됐다. 당시 등은 “생전에 무덤이 훼손될 것을 우려한 피노체트가 화장을 하라는 유언은 남겼다”고 전했다. 또 일간 은 “유가족들은 피노체트의 유해를 군부대에 안장하기를 원했지만, 군 당국이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전했다. 2010년 퇴임한 바첼레트 대통령은 연임 제한 기간 동안 유엔 여성기구 사무총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2013년 12월15일 치러진 대선에서 62%의 압도적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다.
파트리시오 아일윈은 지난 4월19일 산타아고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향년 97. 바첼레트 대통령은 “칠레가 위대한 민주주의자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사흘간의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됐다. 아일윈의 장례는 국장으로 엄수됐다.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천공 “국민저항권으로 국회 해산”…누리꾼들 “저 인간 잡자”
김민전에 “잠자는 백골공주” 비판 확산…본회의장서 또 쿨쿨
박종준 전 경호처장 다시 경찰 출석…김성훈 차장은 세번째 불응
연봉 지키려는 류희림, 직원과 대치…경찰 불러 4시간만에 ‘탈출’
경호처, ‘김건희 라인’ 지휘부로 체포 저지 나설 듯…“사병이냐” 내부 불만
“김건희가 박찬욱에게, 날 주인공으로 영화 한편 어때요 했다더라”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
중립인 척 최상목의 ‘여야 합의’…“특검도 수사도 하지 말잔 소리”
“설탕음료 탓 연 33만명 사망”...미 연구진, 공중보건 위기 규정 [건강한겨레]
건강한 정신, ‘빠져나오는 능력’에 달렸다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