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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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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침묵의 대가

‘피터 량 사건’ 유죄판결로 확인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착각
등록 2016-03-22 20:07 수정 2020-05-03 04:28

2014년 11월20일, 미국 뉴욕의 한 아파트 단지를 순찰하던 새내기 경찰이 쏜 총에 무고한 시민이 맞아 숨졌다. 숨진 시민은 20대 후반 흑인 남성으로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 근래 미국에서 문제가 된 경찰의 과잉 진압과 폭력을 떠올리는 독자라면, 가해자인 백인 경찰에게 석연찮은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으리라 짐작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업무 중 과실치사 혐의가 인정돼 해당 경찰은 지난 2월11일 유죄를 선고받았다. 경찰의 이름은 피터 량. 성에서 짐작할 수 있듯 중국계 미국인이다.
뉴욕시 경찰이 비슷한 일로 유죄를 선고받은 건 10년도 더 된 일이다. 게다가 피터 량 사건이 일어난 지 닷새 뒤, 미국 세인트루이스 대배심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흑인 청년을 총으로 쏘아 살해한 백인 경관 대런 윌슨을 기소하지 않기로 한다. 수천 명의 아시아계 미국인이 거리로 나섰다. 피터 량을 희생양으로 삼은 데 대한 항의부터 피부색에 따라 선별적으로 적용되는 정의를 규탄하는 목소리까지 다양한 의견이 표출됐다(사진).
자신의 지위가 차별받는 소수 인종보다 기득권을 가진 백인에 더 가깝다고 여긴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좀처럼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치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상책이었고, 침묵은 금이었다. 한국계 언론인 제이 캐스피언 강은 지난 2월23일 에 기고한 글에서 ‘피터 량 사건은 그간 지켜온 정치적 침묵의 대가’라고 분석했다. 또한 오랜 세월 침묵한 탓에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쏟아낸 정치적 언어는 대단히 미숙했다고 지적했다.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2013년 백인 자율방범대원 조지 지머만이 흑인 청년 트레이번 마틴을 총으로 쏴 죽이고도 무죄를 선고받자 전국적으로 벌어진 항의 시위) 시위를 수차례 취재하는 동안 흑인과 연대하는 아시아계 미국인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고 제이 캐스피언 강은 회상했다.
한인 사회에 상처를 남긴 1992년 ‘LA 폭동’도 아시아계 미국인과 흑인 사회의 뿌리 깊은 갈등이 폭력으로 비화된 일이었다. 그런데 피터 량을 옹호하는 시위대 중에는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남긴 말을 피켓에 적어온 사람도 있었다. 몇십 년 만에 대규모로 거리에 모여 죄 없는 흑인을 쏘아 죽인 경찰관을 두둔하는 시위를 벌이며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인 루서 킹 목사의 발언을 인용한 것이다. 불의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던 이들의 급조한 언어가 거리에 넘쳐나는 모습을 그는 ‘오랜 침묵이 만들어낸 문화적 실어증’이라 명명했다.
분명 피터 량 사건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사회적으로 백인의 지위에 근접해 있다는 환상을 산산조각 낸 사건이었다.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자신을 소수 인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차별받는 소수 인종은 흑인이나 히스패닉에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미국 내 인종 간 위계질서가 여전히 존재한다면, 가장 도드라지는 경계선은 백인과 백인이 아닌 모든 이들 사이에만 있을 뿐이라는 현실이 확인됐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다른 소수집단과 더 단단히 연대하며 ‘문화적 실어증’을 극복해야 한다.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고 다른 집단과 연대하려면 피터 량 구명 운동보다는 좀더 대의에 가까운 사건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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