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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지 실험’ 이틀 전 떠난 대북특사

1990년대 1차 북핵 위기 때부터 20년 동안 ‘북핵’ 고민한 미국 외교관 스티븐 보즈워스
등록 2016-01-14 16:52 수정 2020-05-03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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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2016년, 묵직한 한 해가 될 것 같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1월6일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깜깜 모르고 있던 정부는 부랴부랴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다. 내놓은 대응책은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다. 한류 아이돌의 노래와 함께 가수 이애란의 을 틀겠단다. ‘수소폭탄에 확성기로 맞선다고 전해라.’ 뭐, 이런 건가?

<font size="4"><font color="#008ABD">소년, 뚱보, 그리고 </font></font>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소년’이라 불린 인류의 첫 핵폭탄은 우라늄탄이었다. 사흘 뒤 나가사키에 투하된 ‘뚱보’는 플루토늄탄이었다. 우라늄탄과 플루토늄탄은 핵분열반응을 이용해 만든다. 1952년 11월1일 서태평양 마셜군도의 에니웨톡 환초에서 미국은 전혀 다른 형태의 핵폭탄 실험을 했다. ‘소시지’로 불린 사상 첫 열핵(수소)폭탄이었다. 핵융합반응을 이용한 ‘소시지’의 폭발력은 ‘똥보’의 약 450배에 이르렀다.

지금 북한은 ‘소년’과 ‘뚱보’와 ‘소시지’를 두루 갖췄다고 주장하는 게다. 무모한 인류가 만들어낸 ‘핵무기 3종 세트’를 머리에 이고 살게 됐다. 대체 어찌할까? 1990년대 이른바 ‘제1차 북핵 위기’ 때부터 30년 세월 ‘북핵’을 고민했던 인물에게서 조언을 들어보자. 최근까지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발벗고 나섰던, 스티븐 보즈워스 전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말이다.

스티븐 워런 보즈워스는 1939년 12월4일 미시건주 그랜드래피즈에서 태어났다. ‘미시건주 2대 도시’라지만, 2015년 말 기준으로 20만 명 남짓 거주하는 한적한 곳이다. 교외의 작은 농장에서 성장한 그는 고교 졸업과 함께 동부 명문 다트머스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2014년 2월3일 스탠퍼드대학에서 행한 회고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트머스대학 미식축구부에서 내게 관심을 가져줬다. 공부도 제법 하고, 운동도 좀 할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대학에 가서 공부는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덩치가 크지도, 발도 빠르지 못해 미식축구는 1년 만에 그만뒀다.”

1961년 7월 대학 졸업을 앞두고 그는 로스쿨 진학과 취업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하버드대학과 미시건주립대학의 문을 두드렸지만,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 그 무렵 미 국무부에서 ‘합격 전보’가 도착했다. 망설임 없이 짐을 싸 워싱턴으로 향했다. 그의 나이 21살 때의 일이다. 그가 외교관 훈련을 받기 시작한 그해 8월 독일 베를린에 거대한 장벽이 세워졌다. 이듬해 10월엔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 직전까지 치달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벌어졌다. 냉전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그런 시절이었다.

그의 첫 임지는 중미의 파나마였다. 1962년 수도 파나마시티에 도착해 1년 남짓 근무한 뒤, 파나마 해협 반대편 콜론 지방의 ‘1인 영사’로 부임했다. 영사관 1층은 사무실, 2층은 공관이었다. 1964년 1월 미국이 장악한 파나마 운하에 성조기와 함께 파나마 국기를 거는 문제를 두고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미군까지 투입돼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서 대학생 등 28명이 목숨을 잃었다.

콜론의 미 영사관도 시위대의 목표물이 됐다. 보즈워스와 가족들은 파나마군의 도움을 받아 파나마시티로 대피해야 했다. 그는 “절망에 빠진 민족주의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처음으로 경험했다”고 말했다. 콜론 영사관은 끝내 폐쇄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KEDO 초대 사무총장으로 한반도와 인연</font></font>

워싱턴으로 복귀해 3년여를 근무한 그는 1960년대 말 두 번째 임지인 스페인으로 떠났다. 프란치스코 프랑코의 친미 독재가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다. 젊은 외교관 보즈워스는 “무너져 가는 친미 독재정권과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프랑코는 1975년 숨질 때까지 권좌를 지켰다.

1970년대 초반은 오일쇼크와 중동전쟁으로 시끄러웠다. 워싱턴으로 복귀한 그는 미국이 주도한 원유 수입국 단체 ‘국제에너지기구’(IEA) 창설 작업에 간여했다. ‘다자외교’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만 39살이던 1979년 북아프리카 튀니지 대사로 임명됐다. 이후 미주간 담당 부차관보, 정책기획국장 등 국무부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1984년 필리핀 대사로 부임한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독재가 저물고 있던 때다. 그는 1986년 ‘피플 파워’를 현장에서 지켜봤고, 독재자와 그 수하들의 하와이 망명을 막후에서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 3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활동에 대한 불만이었다. 한때 북한 핵시설에 대한 ‘정밀타격’까지 고려했던 빌 클린턴 행정부는 곧 협상에 나섰다. 1차 북핵 위기는 1994년 10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체결된 북-미 기본합의로 마무리됐다. 기본합의에 따른 대북 에너지 지원을 위해 한-미-일과 유럽연합(EU) 등이 참여하는 국제기구가 만들어졌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케도)다. 보즈워스는 1995년 케도 초대 사무총장에 임명되면서 한반도와 첫 인연을 맺게 됐다.

케도 사무총장 임기를 마친 그는 1997년 11월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했다. ‘역사적’이란 수식이 붙는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도 지켜봤다. 2001년 2월 이임을 앞두고, 그는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조지 부시 행정부가 대북 정책 기조를 바꿀 것을 염려하는 김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의 국익은 바뀌지 않습니다. 일단 자리를 잡게 되면 부시 행정부도 클린턴 행정부와 비슷한 정책 방향을 취하게 될 겁니다.”

그의 예상은 틀렸다. 부시 행정부 들어 미국의 태도가 돌변했다. 케도는 사실상 무용지물로 전락했다. 여기에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에 대한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북-미 간 대결 구도가 굳어졌다. 그해 12월 북한은 영변 핵시설에서 IAEA 사찰단을 추방했다. 이어 2003년 1월엔 NPT 탈퇴를 선언하고, 핵시설 재가동에 들어갔다. 2차 북핵 위기다.

미국 내에선 “나쁜 행동에 대해 보상을 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들끓었다. 보즈워스는 2003년 2월21일 <pbs>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외교란 게 대부분 나쁜 행동에 대한 보상을 고민하는 거다. 가능한 최저 비용으로 최악의 행동을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외교관의 역할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최저 비용으로 최악 행동 막는 게 외교”</font></font>
2003년 8월 한-미-일과 북-중-러가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6자회담이다. 협상은 쉽지 않았다. 북한은 2005년 2월 핵무기 보유국임을 선언하며 배수의 진을 쳤다. 우여곡절 끝에 2005년 9월19일 중국 베이징에서 전기를 마련했다. 이른바 ‘9·19 공동선언’이다. ‘미국의 위협’이라는, 북한의 안보 불안을 해소해주고, 경제·에너지 지원을 해주기로 회담 참가국이 공동으로 약속했다. 북한은 “보유하고 있는 모든 핵무기와 진행 중인 핵개발 프로그램을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방식으로 폐기”하기로 했다.
쉽지 않았다. ‘검증 가능’과 ‘불가역적’에 함정이 숨어 있었다. 합의 사항의 이행이 늦어지자, 북 외무성은 2006년 10월3일 핵실험을 예고했다. 이튿날 워싱턴의 존스홉킨스대 고등국제학대학원(SAIS)에 딸린 한미연구소가 개원식을 했다. 보즈워스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북한이 사라져주기만 바라고 있다. 그게 대북 정책의 전부다. 부시 행정부는 첫 임기 4년 동안 아무런 정책 없이, 그저 북한이 망하기만 기다렸다. 두 번째 임기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벌써 6년째 북한이 망하기만 기다리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이 조용히 사라져주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2006년 10월9일 북한은 1차 핵실험을 했다. 핵보유국 지위를 굳히려는 북한을 다시 끌어내야 했다. 이번엔 방식을 바꿨다. 쉬운 것부터 해가며 믿음을 쌓아 어려운 것으로 넘어 가는 방식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과정이 ‘동결-불능화-폐기’였다. 2008년 6월 영변 핵시설 원자로 냉각탑이 폭파되는 장면을 <cnn>을 통해 전세계가 지켜봤다. 그게 전부일 줄은 그때 알지 못했다.
2009년 1월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 달 뒤 보즈워스가 대북정책 특별대표(대북특사)로 임명됐다. 그해 3월4일 은 ‘대북특사’를 이렇게 소개했다. “모든 외교관이 꿈꿀 만한 자리다. 어디로 튈지 모를 악명 높은, 악의 축의 당당한 일원이자, 핵무기까지 손에 쥔 독재자와 협상해야 하니 말이다.”
그해 4월 북한이 장거리 로켓 ‘은하2호’를 발사했다. 5월엔 2차 핵실험이 이어졌다. 오바마 행정부는 북을 믿지 않았다. 대화는 이뤄지지 못했다. 보즈워스는 2011년 10월 대북특사 직에서 물러났다. 2013년 2월 북한은 3차 핵실험을 했다. 2008년 12월을 끝으로, 6자회담은 8년여째 열리지 않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냉정을 되찾아야 한다”</font></font>
“우선 모두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그리고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인 2006년 10월14일, ‘향후 대응 방안’을 묻는 시사주간지 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스티븐 보즈워스는 2016년 1월4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췌장암으로 숨졌다. 향년 76.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cnn></p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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