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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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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자가 아니라 황금새벽이었다면

그리스 포퓰리즘
등록 2015-07-24 17:50 수정 2020-05-03 04:28

2012년까지만 해도 그리스의 시리자(SYRIZA·급진좌파연합)는 ‘운동권’이나 정치 관련 전문가, 일부 주식투자가들 정도만 관심을 갖는 정치세력이었다. 신민당과 사회당이라는 양대 정당이 독점하는 체제에서 허약한 기반을 가진 급진좌파 세력이 심상찮은 성장을 하고 있다는 것에 운동권은 어떤 희망을, 주식투자가는 재앙의 전조를 보았던 것 같다.

시리자는 어느새 정권을 장악했고 외국 일에 관심 없는 우리나라에서도 신문을 좀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일종의 정보 비대칭 때문에 그리스와 시리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국내 보수언론은 일제히 그리스 사태에 대해 도덕적 타락과 포퓰리즘이 원인이 됐다고 보도했다. 국내 보수언론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외신을 챙겨보았는데, 이 사태에 대한 관점은 외신들도 각기 달랐다. 유로존의 리더인 독일의 시각을 대변하는 서구 주류 언론을 참고한 사람들은 그리스가 꿔간 돈을 갚지 않는 것과 무책임하게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입에 올리며 결정권을 국민에게 떠넘긴 것에 분개했다.

그러나 그렉시트는 그리스 좌파의 꼼수(?)라기보다 유로존을 재정비하려 했던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의 계획이었음이 드러났다. 독일이 게임이론 전문가를 등에 업은 그리스의 벼랑 끝 협상에도 꿈쩍하지 않은 것은 시리자 정권 붕괴를 통한 ‘파트너 교체’ 정도의 소박한 목표를 상정한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우리는 종종 국가를 의인화하는 단순한 해석으로 국제관계의 이해를 시도한다. ‘돈을 꿔준 독일과 돈을 갚아야 하는 그리스’라는 도식은 이의 결과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안과 밖을 같이 살펴야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각 국가 내 정치세력의 득실, 민간 금융권의 손익, 군사안보적 이해관계 등을 총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보수언론이 말하는 ‘그리스 포퓰리즘’은 사실 양대 정당이 만든 후진적 정치문화의 산물이다. 중도좌파 정당인 사회당과 우파 정당인 신민당은 서로 정권을 주고받으며 그리스의 후진적 정치체제를 심화해왔다. 이를 근거로 어떤 이는 사회당의 사회민주주의를 그리스 사태의 원인으로 꼽는다. 그러나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집권한 신민당의 방만함은 사회당의 그것을 능가했다. 이 양대 정당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무명의 알렉시스 치프라스를 그리스 총리로 만들어줬다. 2015년 초 집권한 치프라스 내각은 오로지 구제금융안 협상에만 매달리며 국내 개혁이라는 숙원은 뒤로 미뤄놓아야 했다. 그러니 이들에게 ‘그리스 포퓰리즘’의 책임을 묻는 건 잘못이다.

그리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치프라스 총리에 대해서도 양면적 평가를 내놓는다. 현실 해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급진적 좌파라는 평가와 의외의 실용주의적 면모에 대한 감탄이 엇갈린다. 하지만 진실은 치프라스 총리가 시리자 내 온건파의 일원이며 ‘목표 달성을 위해 가정을 버리는 것만 빼고 뭐든지 할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번 협상안을 ‘백기투항’으로 간주하는 당내 강경파들은 분당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국내 운동권들이 대책 없이 시리자를 좋아하다 실망하게 되길 기대한 모양이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 있는 정치세력을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어디든 기성정치가 썩으면 새로운 세력이 힘을 얻는다는 것과 이 세력이 누구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권을 잡은 것이 시리자가 아니라 극우정당인 황금새벽이었다고 생각해보라. 정치적 냉소가 확대되는 와중에도 양대 정당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는 우리의 처지는 차라리 다행스럽다.

글·컴퓨터그래픽 김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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