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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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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에 날개 준 부토의 꿈

파키스탄 부흥 위해 아프간 신흥세력 전폭 지원
사우디·미국도 탈레반의 위험성 과소평가했다
등록 2014-02-19 14:51 수정 2020-05-03 04:27

1994년 10월 파키스탄산 직물을 가득 실은 트럭 대열이 아프가니스탄 접경도시 퀘타를 출발했다.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당시 총리의 측근인 나세룰라 바바르 퇴역장군이 이끄는 수송 대열은 칸다하르를 거치는 아프간 주요 국도를 따라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으로 향했다. 수송 대열이 국경을 넘어 아프간 접경도시 스핀볼다크에 접근하자, 신흥 탈레반 세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핀볼다크 인근에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 시절 파키스탄정보부(ISI)가 무자헤딘 세력에 제공하려던 무기와 군수품 집하장이 있었다. 이 집하장 야산의 17개 굴에 수만 명의 병사를 무장시킬 무기가 쌓여 있었다. 아프간 전쟁 시절, 파키스탄정보부가 무자헤딘에 제공하려던 무기를 1991년 소련군의 아프간 철수가 완료되자 이 집하장에 모아두었다. 자베드 아시라프 카지 당시 파키스탄정보부장은 “17개 굴에는 무기와 군수품이 가득했다. 거의 파키스탄군의 절반 병력을 무장할 정도였다”고까지 평가했다.

부토와 파키스탄정보부의 은밀한 거래

집하장의 열쇠를 건네받은 탈레반은 인근 지역 마드라스에 있는 자원자들에게 포장도 아직 뜯지 않은 무기를 배분했다. 탈레반에게 막강한 무장뿐만 아니라 몇 배 증가된 병력이 순식간에 제공됐다. 중앙아시아로 가는 교역로 개척에 나선 파키스탄의 시범 수송 대열은 탈레반을 앞세웠다. 11월 초순, 수송 대열이 칸다하르 외곽 30km 지점에서 통행료를 징수하는 비적과 다름없는 군벌들의 검문소에서 발이 묶이자, 바바르는 탈레반을 불렀다. 탈레반은 간단히 이들을 제압하고, 수송 대열의 자유로운 통행을 확보했다. 갑자기 24시간도 안 돼 탈레반은 칸다하르 중심가로 진공해 전 도시를 장악했다. 무자헤딘 출신 군벌 물라 나지불라와 그의 2500명 병력 및 동맹 군벌들은 11월3일 탈레반의 진공에 저항도 못하고 도시를 넘겨줬다.
탈레반의 칸다하르 장악은 그 세력의 본격적 부상을 아프간 전역에 알린 사건이었다. 탈레반의 칸다하르 장악 이후 군벌들이 자진 투항하는 등 탈레반은 아프간의 남부와 동부 지역을 휩쓸었다. 파키스탄 접경지대의 마드라스에서 공부하던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1995년 2월이 되자 탈레반은 남부와 동부를 중심으로 모두 34개 주 가운데 9~12개 주를 장악한다. 아프간 전쟁 때 무자헤딘 세력의 후견인 노릇을 했던 파키스탄정보부가 이번에도 역할을 했다. 애초 이슬람주의 무자헤딘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의 최대 후원자였던 정보부가 아프간에서 자신의 대리인을 탈레반으로 바꾼 것은 부토 총리와 정보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군사정부 독재자 무함마드 지아 울하크 대통령이 1988년 8월 의문의 비행기 폭파 사고로 사망한 뒤 파키스탄은 민정을 회복했다. 1988년 민정의 첫 총리에 이어, 1993년에 다시 집권한 부토는 파키스탄 경제와 사회의 가시적 발전이라는 성과가 필요했다. 파키스탄에는 전통적으로 강력한 상인계급이 있었고, 카라치 등 국제항구와 수출산업이 일어서고 있었다. 이를 활용해 다른 아시아 국가가 1980년대에 이룬 경제성장을 파키스탄에서도 재현하고자 했다. 파키스탄의 지정학적 위치는 역사적으로 인도나 중동, 중앙아시아로 가는 길목이었다. 하지만 냉전, 특히 아프간 전쟁으로 인해 이란과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파키스탄의 서북부 지역은 꽉 막혔고, 파키스탄은 그 지정학적 가치를 오로지 대결과 전쟁에만 소비해왔다. 이제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와해됐고, 아프간 전쟁도 종결된 상황은 파키스탄의 지정학적 가치를 생산적으로 전환하도록 부토를 숙고케 했다. 부토는 “파키스탄을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오래된 실크로드 교역로의 교차점으로서 국제사회에 상품화”하기를 원했다. 부토는 파키스탄의 수출업자들이 텔레비전과 세탁기를 소련에서 새로 독립한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공화국들에 수출하는 한편, 중앙아시아와 이란에서 석유와 면화가 파키스탄의 카라치 등 수출항으로 수송되는 꿈을 꿨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교역로 개척에서 거쳐야 할 아프간에서는 수백 개 무장군벌이 곳곳마다 설치한 바리케이드와 검문소에서 통행료를 징수하는 비적 활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프간에서의 질서 회복과 안정이 부토의 중앙아시아 교역로 개척의 전제조건이었다. 군부와 그 정보기관 파키스탄정보부의 힘과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부토는 파키스탄정보부의 장군들을 호출해 자신의 구상에 대한 대책을 협의했다.

고지식한 촌뜨기였던 탈레반

군부 내에서는 부토 집안의 충성자인 퇴역장군 바바르가 실무책임을 맡았다. 바바르는 당시 파키스탄으로서는 통제가 불가능한 반파키스탄 입장인 타지크족 출신의 아마드 샤 마수드가 장악한 카불 지역보다는 칸다하르 지역의 질서와 안정을 먼저 회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칸다하르와 헤라트를 통과하는 아프간의 남쪽 간선도로를 통해 이란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갈 수 있고, 이 루트는 카불을 통하는 루트보다 더 유망했다. 석유가 나오는 카스피해 쪽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부토도 이 방안이 유망하다고 생각했다. 부토는 “만약 그 지역 군벌들에게 대가를 지불해 남부 아프간에서의 자유로운 통행이 이뤄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그녀의 선친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죄 속에 있던 군부는 부토와의 관계 개선을 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부와 파키스탄정보부도 부토에게 선물을 줄 방안을 고민했다.
부토 정부가 중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고심할 때 칸다하르에서는 탈레반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바바르에게 탈레반은 시의적절한 대안이었다. 탈레반의 스핀볼다크 무기 집하장 접수는 바바르와 파키스탄정보부의 사전 공작의 결과였다. 칸다하르 점령과 1995년 9월 헤라트 장악으로 탈레반은 카불 남쪽의 아프간 전역을 거의 휩쓸게 된다. 아프간 내전의 양상이 이제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탈레반은 카불로의 진공을 발표했다. 파키스탄정보부도 그들의 대리인이던 헤크마티아르를 버리고 탈레반에 경도됐다.
탈레반들은 빈한하고 고지식한 촌뜨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를 자신들의 주도로 끌고 가는 단호한 투사들이었다. 탈레반의 등장에 갈등하던 파키스탄정보부의 카지 국장은 탈레반 대표들을 라왈핀디의 본부로 초청했다. 그들 대부분은 의족·의수를 했거나 팔다리가 아예 없는 공포스런 행색을 하고 있었다. 탈레반 지도부는 가장 장애인이 많은 집단이며, 전투에서 다친 자신들의 장애를 자랑하곤 했다. 최고지도자 오마르는 오른쪽 눈이 없고, 법무장관 격인 누루딘 투라비와 외무장관 무함마드 가우스도 눈 하나를 잃었다. 카불 시장이 된 압둘 마지드는 다리 하나와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군사사령관이던 물라 다둘라도 다리 하나가 없다. 현대식 가구로 치장한 파키스탄정보부에서도 그들은 땅바닥에 그냥 앉던 자신들의 습관을 눈치 보지 않고 태연히 재연했다. 그들은 더러운 신발을 신은 채 소파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젊은 나이지만 덥수룩한 턱수염과 주름진 얼굴은 그들을 단련시킨 풍상과 세월을 말해줬다. 그들은 카지에게 헤크마티아르 등 다른 아프간 군벌들에 대한 정보부의 지원 중단을 촉구했다. 군벌들이 자신들의 조국을 파괴하고 있다며, 그들 모두의 목을 매달 것이라고 탈레반들은 단호히 말했다. 카지 국장의 회고다. “시골 마을에서 그대로 나온 행색을 한 그들을 보고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들은 국제 문제나 그런 것들에 대해 조금치도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사상 체계가 있었다. 그들이 아주 선의가 있다는 것이 그때 내가 안 모든 것이었다.”
“나는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처음에는 약간의 석유로 시작해 중기계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현찰이 갔다. 탈레반들이 돈을 받도록 내가 일단 승인하자, 나 자신도 그들이 얼마나 돈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백지 위임장이었다.” 부토는 탈레반에 대한 지원 정책의 통제력을 잃었다고 회고했다. 파키스탄정보부는 다시 부토를 우회해 아프간에서 헤크마티아르를 대신해 탈레반을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만들려 했다. 정보부는 심지어 자국군 장교와 게릴라 지도자들을 탈레반에 파견하기까지 했다.

무함마드의 외투 걸친 탈레반 지도자

탈레반은 아프간의 현실에 천착한 노련하고 교활하기까지 한 집단이었다. 도시와 간선도로를 먼저 점령했던 소련군과 달리 탈레반은 농촌마을 하나하나를 차근차근 장악했다. 그들은 부족과 마을, 군벌 지도자와 그 구성원들을 찾아가 협력을 요청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순수한 이슬람으로의 복귀를 실천하고 있다며 도덕적·종교적 명확성을 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 타지크족이 통치하는 카불의 회복을 제안했다. 이슬람과 파슈툰족 민족 감정을 동시에 자극한 것이다. 자신들의 요청에 협력하지 않으면 지도자 암살도 불사하며 나머지 사람들을 강압했다.
대부분의 경우 군사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고, 각 마을에 보낼 군사력도 없었다. 전쟁에 지친 아프간 주민들은 탈레반을 환영했다. 탈레반은 정직과 통일을 위한 새로운 세력으로 자신들을 선전했다. 이슬람 원형으로 돌아가자는 데오반디즘에 뿌리를 둔 탈레반은 데오반디즘의 창시자들조차 수긍 못할 정도로 극단으로 나아갔다. ‘선행진작 및 악덕억제부’라는 긴 이름의 잔혹한 종교경찰을 제도화해 이슬람 교리에 대한 비정통적 해석도 서슴지 않으며 주민을 통제했다. 탈레반이 가혹한 샤리아법을 강제했지만, 주민들은 이를 평화와 사회 안정의 대가로 받아들였다고 캐나다의 정보 분석은 지적했다. 미국 국무부 보고서도 “탈레반은 통치 지역에서 조악한 형태의 법과 질서를 회복했다. 이는 잔혹한 사법체계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버넌스였다”고 지적했다.
탈레반이 카불 진공작전에 나서기 직전인 1996년 4월,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칸다하르의 가장 높은 건물 위에서 선지자 무함마드가 입었다는 전설의 외투를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칸다하르의 최고 성소인 키르카 샤리프 사원에 보관됐던 이 외투를 입은 자는 무함마드의 후계 지도자인 칼리프, 즉 신도들의 사령관이 된다는 아프간의 전설이 있었다. 이런 전설과 무함마드가 입었다는 성스러움 때문에 이 외투는 아무도 손댈 수 없도록 소중하게 보관돼왔다. 오마르는 이런 외투를 사원에 반출해 자신의 몸에 두름으로써, 자신을 무슬림의 지도자로 부각시키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이라는 이슬람 신정국가를 공포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전폭적 지지도 얻어냈다. 사우디 왕가는 걸프전 때 사우디의 미군 주둔을 이유로 자신들을 비난했던 헤크마티아르 등 기존 이슬람주의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자신들의 국체를 모범으로 삼고, 와하비즘의 교리를 수용한 탈레반이 사우디 정보기관 총정보국의 막강한 재정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이때까지 탈레반은 파슈툰 왕정 복고를 꿈꾸는 파슈툰족 전통 부족들의 지도자, 파키스탄, 사우디, 심지어 미국까지 자신들의 욕망을 그리고자 하는 백지였다.

탈레반의 잠재력, 빈라덴은 알았다

하지만 탈레반은 그 자신들의,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에 의해 움직이는 세력이었다. 시골뜨기 청년 집단이 나중에 이슬람권은 물론 전세계 국제정치와 분쟁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할 것을 느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 아프간으로 헤지라를 떠나려 하던 오사마 빈라덴은 탈레반이 세계를 흔들 자신의 성전에 충실한 동맹자가 될 잠재력이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오마르가 무함마드의 외투를 걸치고 카불로의 진공을 시작할 때 빈라덴은 수단에서 추방돼 아프간으로 날아와 자신의 성전 근거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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