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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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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짱이’에게 왜 국가가 돈을 주는가

스위스에서 국민투표에 부쳐질 ‘조건 없는 기본소득’
생태 위기와 불평등 극복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등록 2014-01-10 14:47 수정 2020-05-03 04:27

2013년 스위스에서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Basic Income)을 지급하자는 국민 발의가 성립된 것이 화제가 되었다. 국내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기본소득이란 정확히 말하면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가리킨다. 말 그대로 재산이나 소득이 많든 적든,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지급하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을 받은 사람은 추가의 소득을 위해 노동을 할 수도 있지만, 노동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사회참여나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한 활동을 할 수도 있다.
꿈같은 얘기지만, 스위스에서는 국민 12만6천 명이 서명해 기본소득 지급 안건이 국민투표에 부쳐지게 되었다. 이런 안건을 국민이 제안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로서는 신기한 일이다. 이는 직접민주주의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스위스에는 국민 10만 명 이상이 서명하면 안건을 제안할 수 있는 국민발의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늘어난 일자리는 어떤 일자리인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 소식을 일회성 기사로 소개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특히 생태 위기의 시대에 기본소득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지금 세계는 생태 위기와 극심해지는 사회 불평등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겪고 있다. 그 근본 원인에는 무한성장을 추구하고 자본의 탐욕을 무제한적으로 허용해온 것이 깔려 있다. 경제성장을 위해 자본 통제를 느슨하게 했다. 환경파괴를 용인하고 노동권과 인권을 약화시켰다. 그 결과 국내총생산(GDP)은 증가했는지 모르지만, 생태계는 파괴되고 불평등은 심화됐다.
또한 자동화·정보화가 진행되면서, 경제성장을 한다고 해서 더 이상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드러났다. 이런 상태에서 더 많은 일자리라는 것이 국가정책의 목표로서 적절한가라는 의문도 제기된다. 불가능한 것을 목표로 삼는 면도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일자리가 어떤 것인지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은 어떤 일자리인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원전을 더 지어도 일자리는 늘어난다. 방사성폐기물이 늘어나면 그것을 처리할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무기를 더 만들어도 일자리는 늘어난다. 사회가 더 불평등해져서 범죄율이 늘어나도 일자리는 늘어난다. 교도소도 더 지어야 하고 교도소를 지킬 사람도 더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쁜 먹거리를 사람들에게 제공해서 아픈 사람들이 더 많아져도 일자리가 늘어난다. 이런 일이 많아지면 그것을 담당할 관료조직이 비대해지고, 이런 일에 돈을 투자하거나 빌려주는 곳도 늘어난다.
이런 활동은 경제성장률을 올리거나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이런 일자리의 증가는 불평등을 더욱 심화한다. 실제로 위험하거나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일은 저임금·비정규직 노동자의 몫으로 돌아가기 쉽다. 이런 일로 많은 돈을 버는 것은 극히 소수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들을 통해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더 많은 온실가스를 내뿜고 더 많은 폐기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생태 위기를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 심각한 불평등과 생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본소득에 주목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일하지 않아도 지급하는 소득이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굳이 환경을 파괴하거나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돈을 더 벌고 싶다면 일해도 좋지만 어떤 일을 할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은 높아진다. 좀 덜 벌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량살상무기 vs 베짱이

어떤 사람은 일하지 않는 ‘베짱이’에게 왜 국가가 돈을 주는가, 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하지 않는 베짱이와 대량살상무기를 만드는 노동자 중에 누가 더 ‘기여도’가 높은지, 아니면 세상에 해악을 덜 끼치는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베짱이와 부패한 재벌 총수 중에 누가 더 세상에 기여하는가라는 질문도 던져봐야 한다.
베짱이는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은 동네 어린이들에게 기타를 가르칠 수도 있고, 노인들에게 식사를 만들어 배달하는 자원봉사를 할 수도 있다. 돈을 벌기 위한 활동만 일인 것은 아니다.
물론 기본소득이 지급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을 할 것이다. 기본소득의 지급 수준은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노동으로 벌어야 하는 돈은 줄어들 것이다. 노동시간도 줄어들 수 있다. 그 시간에 진정한 여가를 누릴 수도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다 좋지만 너무 꿈같은 얘기가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중요한 변화들은 모두 꿈에서 시작됐다.
많은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기본소득을 몽상이 아닌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버트런드 러셀, 마틴 루서 킹, 앙드레 고르…, 이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언급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미드도 기본소득을 제안했다. 프랑스 녹색당 출신 유럽의회 의원 이브 코셰나 케인스 평전을 쓴 로버트 스키델스키 같은 사람도 구체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 최저임금의 3분의 2를 지급하자(코셰), 목돈으로 주거나 연간소득으로 보장하자(스키델스키)는 등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우파로 분류될 사람 중에서도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다.
기본소득 대신 시민소득(Citizen Income) 같은 용어도 사용되고 있다. 영국 녹색당은 최초로 하원의원을 배출한 2010년 총선에서 시민연금(Citizen’s Pensions)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제안했다. 영국의 모든 연금 수급자에게 조건 없이(연금 납부 실적과 무관하게) 최저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연금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제안

그렇다면 어디서 돈이 나와 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나올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도 다양한 제안이 나오고 있다. 제임스 미드 같은 사람은 자본과세와 투자신탁으로부터의 수익 두 가지로 실업수당 정도의 생계소득을 지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거래세(토빈세)를 재원으로 삼자는 주장도 있고, 온실가스 배출이나 환경오염에 대해 재원을 부담시키자는 얘기도 있다. 소비세를 통해 재원을 조달하자는 주장, 통화 발행으로 재원을 마련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마다 상황이 다르고, 조세제도 등 여러 제도가 다르므로 반드시 기본소득의 재원 조달 방법이 하나일 필요는 없다.
재원 조달 문제와 함께 기존 사회보장제도와의 관계도 풀어야 할 숙제다. 기본소득이 현실 정책으로 입안되는 과정에서 넘어야 할 산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란 제안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특히 생태 위기와 사회 불평등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상상을 즐겁게 해보게 만든다. 그래서 2014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기를 소망한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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