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25일. 기독교 문명 세계의 최대 성일인 크리스마스 새벽에 아프가니스탄 북서부 소련 접경 지역인 테르메스 인근의 아무다리야강에는 성탄의 고요함에 어울리지 않는 굉음이 울렸다. 소련군 40군이 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탱크를 앞세워 국경을 넘어 전면적 침공을 개시했다. 소련군 40군은 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부대다. 파시즘의 위협에서 세계를 구한 ‘위대한 붉은 군대’의 주력군 중 하나인 40군이 주변 약소국의 침략군으로 나섰다. 하루 전 크리스마브이브, 어둠이 깔리는 아프간 수도 카불의 국제공항에는 소련 안토노프 수송기가 속속 착륙해 공정부대 병력을 풀어놓았다. 이미 아프간 땅에 발을 디뎠던 소련 정보기관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전투요원 700여 명은 아프간 정부군복으로 위장하고 대통령궁으로 향했다. 대통령궁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아프간 사회주의 정권의 수반 하피줄라 아민 총리는 사살됐다.
1978년 쿠데타와 아프간 사회주의 정권
자신들이 지원해서 괴뢰정권이라고까지 불린 아프간 사회주의 정권의 수반 사살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의 첫 수순이었다는 점은 이 침공의 모순을 잘 말해준다. 그 기원은 1년6개월 전인 1978년 4월27일 아프간에서 일어난 유혈 쿠데타다. 아프간 공산당인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의 지도를 받는 사회주의 성향의 일부 육군 및 공군 장교들은 이날 봉기해, 무하마드 다우드 칸 총리를 리셉션에서 암살하고 정부를 전복했다. 3일 만인 4월30일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아프간인민민주당 수반이 지도하는 혁명위원회에 권력이 이양됐고, 타라키는 곧 혁명칙령 1호에 서명했다. 아프가니스탄민주공화국이 선포됐다. 이슬람권에서 최초로 소비에트 스타일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정부가 탄생한 것이었다. 소련이 20년간 공들인 대아프간 공작과 지원의 결실이었지만, 소련에 최대 재앙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타라키 정권은 출범과 함께 내분에 휩싸이며, 통치력이 전무함을 보여줬다.
아프간인민민주당 내에서 타라키가 이끄는 칼크(대중)파와 경쟁자인 바브라크 카르말의 파르참(깃발)파는 정권 출범과 함께 반목과 대립을 보였다. 타라키가 1965년 창당을 주도한 아프간인민민주당은 2년 뒤부터 두 파벌로 나뉘어 반목해왔다. 칼크파는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정부 타도와 소비에트 스타일의 공산정권 수립을 내걸었다. 반면 파르참파는 아프간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할 정도로 산업화되지 않았다며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주장했다.
아프간 공산당 내 두 파벌의 노선과 투쟁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었다. 양쪽 모두 교과서로만 배운 얼치기 교조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반년이 안 돼 두 파벌의 대립은 폭력 사태로 치달았다. 이 와중에 더 큰 사태가 시작됐다. 부족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의 반란이 일어났다.
타라키 정권은 안으로 내분에 휩싸이자, 밖으로 교조적 공산개혁을 더욱 밀어붙였다. 여성문맹타파운동, 징병제, 부족장 토지 몰수, 이슬람식 대부제도 폐지, 신부 지참금 금지, 혼인의 자유 선포 등 많은 개혁은 오히려 기득권을 침해당한 부족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의 반발만을 불렀다. 타라키 정부는 반대 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펼쳤다. 1979년에 접어들면서, 카불의 공산주의 정부는 종교 지도자 등 약 1만2천 명의 정치범을 수감했다. 조직적인 처형이 수용소의 벽 뒤에서 시작됐다.
1978년 10월, 동부 산악지대의 파슈툰 부족 세력들이 총을 잡고 궐기했다. 군나르주, 힌두쿠시 산맥, 바다흐샨주 등 동부의 몇몇 지역은 반정부 거점으로 변했다. 정부군 내에서도 수천 명의 병사가 탈영했다. 1979년 1월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고, 접경한 서쪽 국경지대에서 이슬람 혁명의 여파가 밀려들었다. 2월 수도 카불에서는 아돌프 덥스 미국 대사가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납치돼 결국 피살됐다. 3월 들어 이란과 접경한 헤라트에서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진압을 명령받은 아프간 정부군 육군 17사단 내에서 오히려 반정부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한 병사들은 소련 고문단과 그 가족의 주검을 막대기에 꽂아서 거리에 전시했다.
이란 국경을 넘어온 이슬람 혁명
타라키 정부는 소련에서 훈련받은 조종사들이 모는 전투기를 출동시켰다. 무자비한 공습으로 헤라트에서만 2만 명이 죽었다. 이 반란을 접하면서 소련은 아프간에서의 상황이 심각하게 잘못돼가고 있고, 아프간에서의 공산혁명을 위협하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는 평가를 내리게 된다.
헤라트에서 봉기가 들불처럼 번지던 1979년 3월17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비밀 비상회동을 했다. 3년 뒤 소련의 최고지도자로 등극하는 유리 안드로포프 당시 KGB 의장이 주도한 이날 회의에서 정치국원들은 아프간 정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심각한 문제투성이임을 직감하게 됐다. 다음날 정치국 정례회의에서 소련 지도부 내의 보수파인 디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도 “문제는 아프간 지도부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역할을 충분히 평가하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알렉세이 코시긴 전 총리가 타라키와 통화했다. 타라키는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등 소련 내 중앙아시아 자치공화국 출신 소련군 병사들을 민간인으로 위장해 파병해달라고 애걸했다. 기가 막힌 코시긴은 타라키의 제안을 일축했다. 그는 “당신은 지금 문제를 너무 단순화하고 있다. 아프간의 점증하는 이슬람 봉기는 복잡한 정치적·국제적 문제다”라고 경고했다. 소련 지도부의 인식은 정확했으나 대책은 없었다.
소련 지도부가 상식에 기초한 개혁과 국정 운영을 조언했지만, 타라키는 당내의 같은 파벌인 칼크파 소속 하피줄라 아민 외무장관 겸 혁명위 부의장과도 반목했다. 9월이 되자, 타라키는 소련의 호출로 모스크바로 갔다. 그의 부재 중에 아민의 타라키 축출이 계획됐다. 타라키는 귀국 뒤 체포돼, 몇 주 뒤 카불의 한 병영에서 집중 사격을 받고 최후를 맞는다.
아민의 집권은 소련에는 더 큰 재앙이었다. 소련 KGB의 돈을 받는 관리 대상이던 그는 집권 뒤 거만해졌다. 아민은 아프간 정부의 해외 은행 계좌에 있던 4억달러나 되는 돈을 인출하는 권한을 가지려 했다. 격노한 KGB는 그의 신뢰를 깎아내리려 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유학 경력이 있는 아민이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이라는 허위 정보를 퍼뜨렸다. 이 허위 정보는 돌고 돌아 KGB 본부와 소련 내에도 흘러들었다. 정보 계통에서 ‘블로백’이라 불리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허위 정보를 퍼뜨린 당사국조차 나중에 그 정보에 현혹되는 현상이다.
아민은 집권 뒤 아프간 주재 미국대사관의 대리대사인 브루스 암스튜츠를 5번이나 개인적으로 만났다. KGB는 미국의 의도를 평가하려고 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아민과 암스튜츠의 대화 내용도 알 수 없었다. 아민이 뉴욕에서 유학할 때 CIA와 연관된 아시아재단과 관련이 있다는 문건도 인도에서 나왔다. KGB 요원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퍼뜨린 허위 정보가 사실일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KGB 관리들은 CIA가 아민과 협력해 카불의 친소 정부를 조종하기 시작했다고 결론 냈다. KGB는 11월 들어 최고지도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게 서한을 보내 아민에 대한 단호한 조처가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KGB, 자신들이 퍼뜨린 허위 정보에 현혹되다
안드로포프 KGB 의장은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CIA의 아민 포섭은 “소련 남부의 공화국들을 포함한 ‘뉴 그레이트 오토만제국’을 만들려는” CIA의 거대한 음모의 일환이라는 상상력까지 동원했다. 이런 상상력이 나올 만도 했다. 만약 아프간이 미국의 손에 떨어진다면, 당시 미국이 유럽에 배치 중이던 중거리 퍼싱미사일도 아프간에 배치할 수 있게 된다. 소련으로서는 아프간 공산정부 수립을 지원하지 않으니만 못한 최악의 결과가 어른거리는 상황이었다. 소련 지도부는 아민을 암살하고 아프간에 대한 군사 침공을 개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소련이 가장 우려하던 미국의 개입은 아민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전면적 침공이 있고 나서야 본격화된다. 12월 들어 소련의 움직임은 시작됐다. 12월7일, 권력투쟁에 밀려 망명한 아프간인민민주당 지도자 중 하나였던 카르말이 비밀리에 카불 인근 바그람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아민의 뒤를 잇기로 낙점된 그는 KGB 요원과 소련군 특전부대 병력과 함께 입국했다.
12월10일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은 소련군 참모총장에게 1개 공정사단과 수송항공대 5개 부대의 배치를 시작하라는 구두 명령을 내렸다.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참모총장은 무모하다고 반발했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12월 중순이 되자, 대규모 소련군이 아프간 접경지대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미국 CIA도 12월19일 소련이 72시간 내에 침공을 의도하고 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보고를 했다. CIA가 예측한 시간보다 48시간이 더 지나서 소련군의 전면적인 침공이 시작됐다.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24일이었다.
이틀 뒤 카터 행정부 내의 가장 강경한 냉전전사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카터 대통령에게 비밀 정책보고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 개입에 대한 대책’을 보냈다. “아프간에서의 저항을 지속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는 파키스탄을 설득해서 반군을 지원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이는 파키스탄에 대한 우리의 정책 재고를 요구하며… 파키스탄에 대한 우리의 안보정책이 핵비확산 정책에 좌우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켜야 한다. 우리는 중국이 반군을 지원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반군을 지원하는 선전 활동과 비밀 공작에서도 이슬람 국가들과 협력해야 한다.”
파키스탄의 핵개발도 용인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했다. 이는 파키스탄의 핵무장을 이끌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은 그 뒤 북한과 이란의 핵개발 등 냉전 이후 미국의 최대 안보 현안이던 핵확산 문제를 야기한 모델이었다. 따지고 보면, 현재 25년 가까이 계속되는 북한 핵개발 위기도 그 근원의 하나는 아프간 사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브레진스키는 단호한 어조로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의 철수다. 설사 이것이 달성 불가능할지라도, 우리는 소련이 가능한 한 최대의 비용을 치르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침내 시작된 미국-소련 그레이트 게임
아프간을 무대로 한 미국과 소련의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 게임은 소련에 체제 붕괴라는 비용을 치르게 했다. 하지만 미국도 승자는 아니었다. 미국은 아프간에서 자신의 돈과 무기로 이슬람주의 세력이라는 새로운 적을 키워냈고, 소련 붕괴 뒤 이들과 고투 중이다. 20세기 전후 아프간을 무대로 한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이 결국 두 제국의 쇠락을 초래한 것과 비슷하다.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간 전쟁은 또 현대 이슬람주의의 헤지라다. 서기 622년 9월 어느 날,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는 메카를 떠난다. 메카에서의 박해를 피해 추종자를 거느리고 메디나로 향한다. 무함마드와 무슬림들은 메디나에서 이슬람 공동체 움마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북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에서 인도아대륙 북단까지 이슬람 세계를 건설했다. 현대 이슬람주의자들도 아프간을 통해 이슬람주의를 이슬람 세계 전역에 본격적으로 확산시킨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이승환, ‘구미 사태’ 후 공연 요청 줄이어…“7월까지 ‘헤븐’ 투어”
[단독] 입법조사처 ‘한덕수, 총리 직무로 탄핵하면 151명이 정족수’
[단독] ‘총선 전 계엄’ 윤석열 발언 당일 신원식, 김용현 불러 대책 논의
‘내란 비선’ 노상원 수첩에 정치인·언론인 ‘사살’ 표현 있었다
대만 전자산업노조 “삼성 반도체 경쟁력 부족은 근로시간 아닌 기업무능 탓”
북 충돌 빌미로 계엄 노린 듯…노상원 수첩엔 ‘NLL서 공격 유도’
[단독] 윤석열, 3월 말 “조만간 계엄”…국방장관·국정원장·경호처장에 밝혀
세계서 가장 높이나는 새, ‘줄기러기’가 한국에 오다니
12월 24일 한겨레 그림판
윤석열 쪽 “엄연한 대통령인데, 밀폐 공간에서 수사 받으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