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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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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붕괴’ 위기 멕시코 희망의 싹을 찾아 나서다

정부 실정에 옛 집권당 제도혁명당 니에토 후보 선두 달리는 멕시코 대선 중도좌파 민주혁명당 지리멸렬한 가운데 독자적 노동자정당 건설 노력 일어
등록 2012-05-24 14:09 수정 2020-05-03 04:26

재정위기와 프랑스·그리스의 정권 교체 때문에 유럽이 화제의 초점이 된 와중에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멕시코가 중대한 선거를 맞이하고 있다. 오는 7월1일 멕시코에서는 대통령 선거와 상·하원 총선거가 동시에 실시된다. 멕시코는 6년 임기의 대통령과 상원의원을 함께 선출한다. 이번에는 이에 더해 3년 임기인 하원의원 선거도 있다. 향후 6년간의 권력 지형이 7월1일에 모두 결정되는 것이다.

멕시코, ‘국가 붕괴’의 생생한 연구 주제
이번 멕시코 선거는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멕시코는 21세기 들어 등장한 아메리카 대륙의 팽팽한 대립 구도에서 권력의 추가 미국 쪽으로 기우는 데 더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통해 미국에 단단히 묶여 있는 멕시코는 중남미 좌파 붐이 북상하는 것을 막는 방파제와도 같다. 더 나아가서는 콜롬비아와 함께 중남미 좌파 정부들의 틈바구니에서 미국이 패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전초기지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지정학적 점이지대 노릇을 하며 멕시코 사회는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다. 미국과의 국경지대(마킬라도라)에서 번창하는 저임금 공장들 외에 이 나라의 다른 산업은 질식 상태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빈곤선 아래의 삶을 살고 있고, 일자리가 없어서 국민의 10% 이상이 국경선을 넘어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
국경지대는 조직범죄의 온상이기도 하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창궐하는 마약산업을 소탕하겠다고 정부가 군대까지 동원했는데, 이 바람에 거의 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내전 아닌 내전 상태다. 정치학자들은 이제 이 나라를 ‘국가 붕괴’의 생생한 사례로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선·총선이 한꺼번에 실시된다. 그러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지난 2006년 대선에서는 치열한 좌우 접전을 펼친 바 있다. 이때 현 대통령인 국민행동당(PAN)의 펠리페 칼데론이 35.89%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지만, 민주혁명당(PRD)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이니셜을 따라서 AMLO라 불리기도 함) 후보도 35.31%를 얻어 표차가 25만 표 정도밖에 안 되었다. 만약 이런 분위기가 이번 선거에서도 이어진다면, 흥미로운 한판 승부가 될 것 같다.
실제 이번 선거로 정권이 바뀔 가능성이 높다. 여당인 국민행동당은 호세피나 바스케스 모타라는 여성 후보를 내세웠으나, 여론조사에서 한 번도 1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칼데론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감이 워낙 강해, 국민행동당 심판 정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타 후보도 되도록 자기 당과 거리를 두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야권에서는 6년 전 석패했던 오브라도르가 다시 한번 대선주자로 나섰다. 이번에는 민주혁명당만의 후보가 아니라 군소 좌파 정당인 노동자당·시민운동당이 포함된 ‘범진보전선’의 공동 후보다. 2006년에 그랬던 것처럼 올해에도 멕시코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좌파 성향 유권자들은 오브라도르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다. 하지만 선거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지금, 그는 여론조사에서 ‘당선 가능성 1위’ 후보는 아니다. 연초에 일부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모타 후보와 2위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형국이다.

6년 전보다 후퇴한 멕시코의 정치
선거가 가까워올수록 1위 자리를 굳히고 있는 것은 제도혁명당(PRI)의 페냐 니에토 후보다. 제도혁명당도 현재 야당은 야당이다. 하지만 멕시코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이 당에는 ‘야당’이라는 표현이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최근까지 만년 집권당이었기 때문이다.
제도혁명당의 출발은 원래 멕시코혁명의 성과를 제도로 정착시킨다는 ‘좌파적’인 것이었다(지금도 이 당은 국제 사회민주당 조직인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의 회원이다). 하지만 70여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장기 집권하며 애초의 이념은 그저 권력을 치장하는 수단에 불과하게 되었다. 제도혁명당 일당 지배의 결과로 멕시코 사회는 정실주의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고, 1980년대부터는 아예 이 당이 앞장서서 멕시코혁명 이념을 폐기하고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다.
제도혁명당의 장기 집권 체제를 무너뜨린 게 2000년 대선이었다. 이때 국민행동당의 비센테 폭스가 대통령에 당선돼 거의 한 세기 만에 평화적 정권 교체가 실현되었다. 이후 현 칼데론 대통령까지 12년간 국민행동당 정권이 이어졌다. 그런데 국민행동당은 제도혁명당보다 더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성향을 보였다. 압제와 부패의 상징이던 제도혁명당은 중앙정부에서 밀려났지만, 멕시코 사회의 붕괴는 오히려 가속화되기만 했다.
이런 점에서 2006년 대선은 참으로 중요한 기회였다. 중도좌파 성향인 민주혁명당(제도혁명당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인터내셔널’ 회원)이 집권의 다음 주자가 되었다면, 2000년 정권 교체로 시작된 정치적 변화가 사회적 변화로 확대되는 양상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오브라도르 후보와 그의 지지자들도 이런 기대를 잘 알기에 대선 ‘패배’ 뒤에도 부정투표 혐의를 제기하며 좀처럼 대선 결과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오브라도르는 자신이 선거의 진짜 승자이며 따라서 ‘진짜 대통령’이라고 자처하며 그림자 정부를 구성하고 반정부 투쟁의 선두에 나섰다. 도시는 물론 시골 구석구석까지 멕시코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고, 에너지 사유화 반대 투쟁 때는 하원 점거 투쟁을 이끌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달리는 것은 제도혁명당의 니에토 후보다. 반칼데론 민심이 결국은 12년 만에 제도혁명당을 다시 여당으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멕시코 사회의 위기에도 이 나라의 정치는 6년 전보다 더 후퇴한 것만 같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뼈아픈 것은 AMLO 진영의 취약성이다. 특히 오브라도르의 친정이라 할 수 있는 민주혁명당이 골칫거리다. 대선 실패 이후 2년 뒤 민주혁명당에서 당 대표 선거가 있었는데, 이때 당내 친AMLO파와 반AMLO파가 격돌했다. 두 진영은 상대방을 부패세력으로 몰며 이전투구를 벌였다. 권력과 이권에 눈먼 당내 파벌들의 추악한 모습이 대중에게 그대로 노출되었다. 멕시코혁명 정신의 회복을 위해 싸우는 정당이라는 민주혁명당의 기존 이미지는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하게 되었다.

정권 동원 기구 구실했던 노동조합
오브라도르로서도 민주혁명당의 이런 실추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적은 유지하면서도 2011년 ‘국민혁신운동’(MORENA)이라는 정치조직을 따로 만들어 민주혁명당보다는 이 조직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범진보전선의 주축은 역시 민주혁명당이다. 따라서 민주혁명당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오브라도르 후보의 발목을 잡는 결정적 약점이 되고 있다.
참으로 답답한 형국이다. 하지만 새로운 대안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없지는 않다. 멕시코 역사상 최초로 독자적인 노동자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2011년 8월27일, 멕시코의 22개 주에서 선출된 대의원 1천여 명이 멕시코시티에 모여 ‘노동자민중정치조직’(OPT)을 출범시켰다. 이 조직은 그 자체로 정당은 아니지만 노동자정당 창당을 목적으로 한 일종의 창당준비위원회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멕시코가 ‘출구 없는’ 사회가 된 데는 노동운동의 탓도 크다. 멕시코혁명과 함께 성장한 이 나라의 노동운동은 태동기부터 혁명정부와 밀접한 협력관계에 있었다. 이것이 이후 제도혁명당에 대한 노동조합의 종속을 낳았다. 제도혁명당이 우경화·관료화할수록 노동조합도 어용노조로 변질돼갔다. 제도혁명당의 독재에 맞서 대안이 되어야 할 노동세력이 오히려 그 지지 기반이 되고 만 것이다. 지금도 제1노총인 멕시코노동자총연맹(CTM)은 제도혁명당의 산하기구나 마찬가지다(최근 CMT 산하 교원노조가 제도혁명당과의 이권 갈등 때문에 ‘신연합당’이라는 새 당을 만들었지만, 이 당은 노동자정당의 성격과는 상관없는 선거용 우파 정당이다).
마치 1980년대 한국처럼 멕시코에서도 어용 노총에 맞서는 민주노조운동이 등장했다. 민주노조들이 모여 제2노총인 전국노동자연합(UNT)을 결성하기도 했다. UNT는 정치적으로는 민주혁명당을 지지했다. 이것은 노동조합이 정권의 동원 기구 역할을 하던 관행을 깼다는 점에서 분명 커다란 전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주혁명당이 노동운동과 유기적 연계를 맺은 노동자정당은 아니었다. 제도혁명당에 맞서려는 반독재연합 성격이 더 강했다.
그래서 UNT와 민주연합당 사이의 연계는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민주연합당이 위기에 빠지자 둘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민주’ 노조로 분류되던 노조들 사이에서 국민행동당을 지지하는 이탈 세력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이런 일탈이 나타나는 것은 비례대표 의석 때문이다. 노조 상층 간부들이 비례대표 후보 자리를 따내려고 우파 정당과의 거래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앞에 소개한 OPT는 바로 이러한 세태를 비판하며 민족 해방과 사회 해방의 이념에 기반한 노동계급정당의 건설을 제창하고 있다. OPT의 중심에는 멕시코전력노조(SME)가 있다. SME는 최근 에너지 사유화 반대 투쟁의 선봉에 나서 전투적 노동조합의 대명사로 떠오르는 조직이다. 이들은 민주혁명당에 실망한 UNT 산하 다른 노조들을 설득해 혁명노동자당(PRT·멕시코의 유서 깊은 트로츠키주의 정파) 등 좌파 그룹들과 함께 강령 및 당헌 제정 작업을 하나하나 진행해가고 있다.

OPT, 대선에선 오브라도르 후보 지지
당장 대선에서는 OPT도 오브라도르 후보를 지지한다는 태도다. 하지만 대선 이후의 정치적 계획에서는 범진보전선에 속한 다른 정당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독자적 노동자정당을 반드시 건설하겠다는 것이 OPT의 조직적 결의다. 어쩌면 당장의 대선 결과보다는 이 결의의 실현 여부가 우리가 지금 붕괴 일로의 멕시코를 바라보며 더 주목해야 할 희망의 싹일지 모르겠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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