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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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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화약고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등록 2007-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이바르강을 사이에 두고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가 삿대질하는, 세계 유일 분단 도시 미트로비차

▣ 글·사진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정치학 박사
kimsphoto@hanmail.net

1999년 3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코소보 개입 공습이 벌어진 지 벌써 8년. 그동안 유엔보호령으로 지내온 코소보는 크고 작은 유혈극을 빚어왔다. 코소보 북부 이바르강을 사이에 두고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가 대치하는 분단도시 미트로비차. 지난날 베를린에 이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 도시인 미트로비차는 한반도 분단 극복에 어떤 시사점을 던지는가.

1999년 6월 거리 곳곳에 썩어가는 시체

전쟁으로 한 세기를 보낸 유럽의 발칸반도가 20세기에 마지막으로 치른 유혈 투쟁이 코소보 전쟁이다. 한반도의 20분의 1 크기로 발칸반도의 좁은 지역인 코소보에서는 150만 난민이 생겨났고, 1만 명쯤이 죽었다. NATO군 집계에 따르면, 적어도 5천 명의 알바니아계 비무장 민간인들이 세르비아 무장세력에게 마구잡이로 즉결 처형당했다. 지구촌의 다른 많은 전쟁들이 그러했듯이, 이 전쟁도 종교, 언어, 문화, 정서가 다른 이민족끼리의 유혈극이었다(다수 알바니아계는 이슬람교, 소수 세르비아계는 동방정교의 하나인 세르비아정교다).

사상자와 난민이 늘어나자, 서방 언론들은 서유럽 땅으로 발칸 난민 홍수가 밀려들 것을 걱정했다. 동유럽을 자국 시장권에 편입하려는 미국 자본가들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NATO군이 ‘인도주의’라는 거창한 깃발을 올리고 개입해 78일 동안 공습이 벌어지면서 국제전 양상으로 번졌다. 유럽 땅에서 멀리 떨어진 수단 다르푸르 지역에서 최근 3년 사이에 20만 명이 ‘인종 청소’를 당하는 비극이 벌어져도 국제사회가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모습과는 참 대조적이다.

1999년 6월 초 NATO군을 따라 코소보로 들어서니, 곳곳에서 희생자들이 버려진 채 썩어가고 있었다. 그 일부는 전쟁의 혼란 속에 주인을 잃은 굶주린 개들에게 훼손당한 끔찍한 모습이었다. 코소보 서부 코레니차 마을로 들어서니, 바로 그렇게 온몸이 물어뜯긴 주검 앞에서 40대의 한 여인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만큼 그녀의 울음소리는 처절했다.

인류 잔혹사에 또 다른 어두운 기록을 더한 채 코소보 전쟁이 끝난 지도 어느덧 8년이 넘게 흘렀다. 전쟁이 할퀴고 간 갈등과 증오의 흔적들은 아직도 코소보 곳곳에 남아 있다. 많은 집들이 파괴된 채로 버려져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코소보 사람들은 알바니아계(200만 명), 세르비아계(15만 명) 가릴 것 없이 모두 전쟁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코소보 전쟁 뒤 전쟁범죄자로 기소돼 헤이그 전범재판소 감옥에 갇혔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전 유고연방 대통령)는 2006년 3월 심장마비로 죽었다. 전쟁의 한 당사자는 그렇게 역사의 무대 뒤로 물러났지만, 코소보의 불길은 현재 진행형이다. 다수 알바니아계와 소수 세르비아계 사이에 툭하면 유혈 충돌이 벌어진다.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이다. NATO군이 주축이 된 코소보평화유지군(KFOR) 병력 1만6천 명과 유엔코소보행정청(UNMIK) 소속 경찰 2천 명은 그런 피의 현장에 출동하느라 바쁘다.

코소보 북부 도시 미트로비차는 코소보 긴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시내를 남북으로 가르는 이바르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알바니아계가, 북쪽은 세르비아계가 주도권을 쥐고 서로에게 삿대질하는 중이다. 남북을 잇는 2개의 다리(동교, 서교)는 프랑스군 소속 KFOR 병사들이 탱크로 중무장한 채 출입을 통제한다. 두 개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총격전이 이어지곤 했다. 다리 밑으로 몰래 다가가 수류탄을 던지는 일들도 벌어졌다.

그들의 증오가 화해로 바뀌려면…

코소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와 소수 세르비아계 사이에 쌓인 증오와 불신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처럼 미트로비차에 깔려 있다. 이바르강 남쪽에는 5만 명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북쪽에는 1만 명의 세르비아계 주민들과 6천 명의 집시들이 몰려 산다. 인류학자들이 ‘로마’(Roma)라 일컫는 집시들은 타고난 유랑민으로 “코소보 전쟁 중에 세르비아계와 손잡고 (오래전부터 멸시를 받아 미움이 쌓였던) 알바니아계 주민의 집을 불태우는 등 인종 청소를 거들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런 탓에 집시들은 전쟁 뒤 알바니아계의 보복을 피해 이바르강을 넘어와 유엔난민구호기관(UNHCR)이 건네준 천막에서 어렵게 지낸다.

지금껏 코소보는 유엔의 보호령이다. 1945년 8·15 해방 뒤 3년 동안 남한에 머물렀던 미 군정청과 같은 것이 유엔코소보행정청이다. 국제법으로 보면, 코소보는 아직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하는 세르비아공화국의 주권 아래 놓여 있다. 다수 알바니아계는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독립국가의 틀을 갖추고 싶어한다. 그들의 꿈은 유럽연합(EU)에 가입한 독립국가 코소보다. 그런 꿈은 안 그래도 ‘세계의 화약고’란 별칭을 지닌 발칸반도에 새로운 유혈을 불러일으킬 불씨다. 피의 학살과 보복전을 치러왔던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사이의 증오가 화해로 바뀌려면, 한국전쟁을 치른 뒤 50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만났던 한반도처럼 긴 세월이 흘러야 할까? 피를 나누고 언어가 같은 우리 한민족보다 더 긴 시일이 걸릴까?

격주로 연재될 ‘김재명의 전쟁과 평화’는 미국이나 유럽 등 남의 시각이 아닌 바로 우리 시각에서 분쟁을 바라보고, 이를 거울 삼아 한반도 분단 극복의 길을 모색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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