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서울올림픽. 복싱 라이트헤비급 결승에 진출한 박시헌의 상대는 미국의 복싱 스타 로이 존스 주니어였다. 박시헌은 대회 전 엄지손가락이 부러지고도 출전을 감행해 분투했지만, 압도적인 기량의 슈퍼스타를 상대하기엔 힘에 부쳤다. 2라운드엔 한 차례 스탠딩 다운까지 당했다. 경기가 끝나고 모두가 완패를 받아들이려던 때, 주심은 박시헌의 손을 들었다. 한국의 12번째 금메달이었고, 그로써 한국은 서독을 제치고 종합 메달 순위 4위에 오르는 불편한 쾌거를 완성했다. 초등학생이던 내게 민망함이라는 감정을 알려준 순간이었다.
주심이 자신의 손을 들어줄 때 박시헌이 지은 어색한 표정에는 그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시상식에서는 야유까지 터져나왔고 애국가를 부르는 박시헌의 입술은 굳어 있었다. 세월이 흘러 박시헌은 “승패는 선수가 제일 잘 안다. 내가 진 게임이다. 비난이 괴로워 자살도 생각했다”라고 술회했다. 훗날 이 판정은 미국과 2위 싸움을 펼치던 동독이 심판들에게 사전 ‘작업’을 한 결과라는 의혹이 불거졌다. 부러진 손가락으로 결승까지 올라간 박시헌의 투혼은 부정한 챔피언이라는 낙인으로만 남았다. 세계의 비난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23살의 복서 박시헌은 올림픽 직후 “조국이 나의 은메달을 빼앗아갔다”는 말을 남기고 링을 떠났다. 그에게 패배한 로이 존스 주니어는 프로에 진출해 4체급을 석권하는 전설이 되었다.
지난 인천아시안게임. 여자 복싱 라이트급 시상식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인도의 라이슈람 사리타가 준결승에서 자신을 꺾은 은메달리스트 한국의 박진아에게 다가가 편파 판정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자신의 동메달을 걸어주는 초유의 퍼포먼스가 발생했다. 당황한 박진아는 눈물을 보였고, 공식적인 제소 절차를 무시하고 표현된 투박한 항의에 언론의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나 지극히 형식적인 제도에 불과한 이 제소 절차가 억울함을 해결해준 역사가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88년의 로이 존스 주니어가 신청한 제소도 1997년에 최종 기각됐다.) 박진아와 인도 선수의 경기는 누가 봐도 인도 선수의 유효 펀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돌려 말할 필요 없다. 명백히 인도 선수의 승리였다.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심판들만의 기준이 있다면, 그래서 이 경기가 박진아의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이 맞다면 복싱은 더 이상 스포츠일 이유가 없다.
큰 대회에서 반복되는 홈 텃세는 선수는 물론 해당국의 국격까지 훼손하는 행위다. 88 서울올림픽에서 한국이 4위를 했다는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박시헌은 지금까지도 편파 판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역사에 소환되고 있다. 태릉에서 흘린 한국 선수들의 땀만큼, 각국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대회를 준비해온 선수들이 있다. 그들은 아시안게임의 숫자놀이에 그저 동원된 자들이 아니다. 작위적으로 쌓아올린 메달 순위에 감동할 국민은 아무도 없다. 스포츠를 숫자로만 결산하는 자들만 모를 뿐이다.
라이슈람 사리타 선수에게, 한 한국인이 말씀드립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이긴 시합입니다. 박진아 선수의 책임은 아닙니다만.
김준 사직아재·칼럼니스트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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