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월드컵 조별예선 첫 탈락팀은 지난 대회 우승국 스페인이었다. 네덜란드전의 치욕적인 참패 이후 칠레에도 완패하며 디펜딩 챔피언은 무너졌다. 짧고 비수 같은 패스로 상대를 토막 내던 티키타카는 힘과 스피드의 축구에 압사당했다. 세계를 정복하던 스페인의 전진이 멈춘 것이다.
전세계가 스페인의 참패를 조롱할 때, 한 신문이 이들을 끌어안고 나섰다. 스페인 스포츠 일간지 <as>는 탈락이 확정된 다음날, 1면에 눈물을 흘리는 이니에스타와 만신창이가 된 카시야스의 사진을 싣고 “(국민에게) 용서해달라고 하지 마세요. 우린 이미 당신들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챔피언이던) 그 시간 동안 참 행복했어요”라는 헤드라인을 입혔다. 그들의 황금세대가 경이적인 패스들로 선물했던 영광의 역사 앞에서, 월드컵 조별예선 탈락은 그들이 마땅히 보듬어줘야 할 상처였다.
한국이 알제리에 패한 날, 한국의 스포츠 기사를 읽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네티즌들의 원성과 조롱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 네티즌들 앞에서 깃발을 흔들며 기름을 부어댄 것은 기자들이었다. 러시아전 직후 홍명보 감독에 대한 기대를 쏟아내던 기자들은 알제리전 이후 온갖 저열한 수사와 촌스러운 비유로 홍 감독을 조롱했다. 급기야 한 스포츠 신문은 2년 전 올림픽 동메달 이후 박주영의 외신 인터뷰를 들춰내 전후 맥락을 생략한 채 “군대 면제가 목표였다”는 한 줄의 자극적인 번역 문장만을 기사화하며 선수를 거의 정신병리학적 환자로 몰아갔다. 그러고는 박주영이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꺼린다고 불만 어린 기사도 쓴다. 참담한 풍경이다. 페이지뷰를 늘리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으로 조롱을 난사하며 손쉽게 여론에 편승해 낄낄거리는 자들이 ‘기레기’ 외에 다른 무슨 직함을 원하는가.
우리에게도 추억은 많다. 지난 10여 년간 월드컵 4강과 16강, 올림픽 동메달을 이뤄낸 아시아팀은 한국이 유일하다. 그것들은 지금 당신들이 총력으로 사냥 중인 홍명보와 박주영에게 빚지고 있는 추억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홍명보의 전술과 박주영의 경기력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선수와 감독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역사를 근본부터 조롱하는 모습엔 비애가 느껴진다. 이미 우리는 1998년, 같은 방법으로 차범근을 잃은 바 있다.
한국 축구팀에 월드컵은 우승을 목표로 할 수 있는 대회가 아니다. 단일 종목의 월드 챔피언을 가리는 대회는 늘 승리보다 패배를 더 많이 경험하기 마련이며, 그저 이 시간들을 동시대의 즐거운 추억으로 어떻게 기록해놓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기간이다. 축구에 대한 품격은 실패를 마주 보는 태도에 있다. 스페인 대표팀의 참담한 실패를 보듬어안는 그 신문의 품격을 보라. 한국 축구는 늘 한국 언론보다는 준수했다. 한국 축구의 품격을 흐리고 우리의 추억을 훼손하며 동시대를 조롱해온 것은 언제나 기자들이었다. 최소한 한국 언론은 월드컵에 나갈 자격이 없다.
김준 사직아재·칼럼니스트</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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