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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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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스는 ‘팀’이다

등록 2013-03-19 18:02 수정 2020-05-03 04:27

지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달구고 있는 팀은 압도적 꼴찌였던 퀸즈파크레인저스(QPR)입니다. 시즌 개막전부터 QPR는 단 한 번도 꼴찌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QPR라는 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역시 박지성 선수 때문입니다. 박지성이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리미어리그 팀의 주장 완장을 찬 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QPR는 한국팬이 경험한 가장 참담한 해외 팀이었습니다. 박지성을 비롯해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준수한 선수들을 불러모았지만, 패스는 실종되고 킥만 난무했으며 무리한 개인기를 부리다가 실소를 자아내는 선수로 가득한 팀이었습니다. 마치 일요일 아침 한국의 어느 학교 운동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조기축구를 거듭하며, 급기야 시즌 개막 뒤 16경기 동안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감독이 바뀌었고, 주장이 바뀌었고, 주전도 바뀌었고, 몇 명의 선수를 더 보완했습니다. 어쨌거나 기어이 1승을 해냈고, 심지어 첼시를 상대로 승리를 챙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혼자 뛰어다니는 선수가 많았고, 으레 그렇듯 팀내 불화설도 나왔습니다. 시즌은 어느덧 종반으로 치달았으며 QPR의 리그 잔류 가능성 앞에는 이제 ‘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QPR의 마지막 선택은 개인 기량이 아닌 팀플레이였습니다. 3월3일 경기부터, 개인기에 의존하던 선수들을 빼고 박지성을 비롯한 헌신적인 선수들로 주전을 물갈이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QPR는 왜 그들이 프리미어리그 팀인지를 입증하기 시작했습니다. 11명의 선수가 유기적으로 움직였고 선수들은 끊임없이 패스 받을 공간을 만들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순식간에 두세 명이 상대 선수를 에워싸서 공을 뺏어냈고, 박지성은 또다시 그라운드의 모든 곳에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했으며, 불만투성이였던 보싱와는 상대 선수의 발 앞에 머리를 들이밀며 필사적으로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결국 사우샘프턴에 2-1 승리를 일구어낸 그들은 다음주 선덜랜드전에서는 선취골을 뺏기고도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3-1 역전승을 이끌어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강등권 탈출 가능성에서 ‘기적’이라는 수식어를 삭제시켰고, 모든 축구팀의 에이스는 ‘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해내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한 번 지는 것이 뉴스가 되는 바르셀로나 같은 팀이 있고, 한 번 이기는 것이 뉴스가 되는 QPR 같은 팀도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와 같은 아름다운 축구쇼를 보는 것은 경이롭지만, QPR처럼 오합지졸의 선수들이 하나의 팀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감동을 줍니다. 남은 기간, 프리미어리그에 남은 최고의 드라마는 마침내 팀으로 진화하는 QPR의 11명이 만드는 기적입니다.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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