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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의 미우라

등록 2013-01-22 17:00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김진수 기자

한겨레 김진수 기자

현재 일본 축구를 대표하는 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가가와 신지입니다. 가가와 이전에 한국 축구를 위협한 선수는 혼다 다이스케였습니다. 더 멀게는 나카타 히데토시라는 추억의 이름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30~40대에게 한국을 위협한 일본 축구의 심장은 누가 뭐래도 미우라 가즈요시(사진)입니다. 1990년대 초반, 일본의 미우라는 한국 축구를 위협한 단 하나의 흉기였습니다.

1986년부터 한국 축구는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한국보다 더 오랜 기간 월드컵에 연속 진출한 국가는 브라질·독일·이탈리아·아르헨티나·스페인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월드컵에서 한국은 아시아 예선을 비교적 수월하게 통과했습니다. 이 위대한 기록이 가장 크게 위협받았던 것은 역시 1994년 미국 월드컵입니다. 그때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한국은 마지막 북한과의 경기를 3-0으로 이기고도, 마지막 휘슬이 울리고 나서 월드컵 예선 탈락이라는 악몽 앞에 머리를 숙이며 경기장을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1분 늦게 종료된 다른 경기장에서 이라크가 종료 10초를 남기고 극적인 골을 넣으며 일본을 침몰시켰다는 속보가 타전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른바 ‘도하의 기적’으로 기억되지만, 일본으로선 도하의 악몽이었습니다. 마지막 10초를 버티지 못하고 사상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의 꿈을 미뤄야 했으니까요. 이라크의 마지막 골에 침몰한 일본의 경기장 어딘가에서는 미우라의 비명이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당시 도쿄 거리에 주저앉아 통곡하던 일본 시민들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국이 마지막 경기에서까지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던 이유는, 일본과의 예선 경기에서 미우라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당했던 패가 결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종 예선이 시작되기 전부터 언론에서는 일본의 신성 미우라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선수들도 팬들도 아직까지는 일본 축구는 안중에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선수에게 결승골을 얻어맞으며 패하고, 월드컵 본선 탈락이라는 절벽 끝까지 몰렸던 한국 축구팬들에게 1993년의 미우라는 정말로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그 뒤로 5번의 월드컵이 열렸고, 미우라에 맞서 싸운 한국의 영건 홍명보와 황선홍은 지금 감독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놀라운 사실은, 그 미우라가 아직 현역 선수라는 것입니다. 하부 리그이거나 사회인 축구가 아닙니다. 조기축구도 버거울 나이 46살에, 미우라는 J리그 요코하마 FC와 2년 선수 계약을 더 연장했습니다. 비록 라이벌 나라의 선수지만, 한국 축구를 벼랑 끝까지 밀어넣은 공포의 스트라이커였지만, 아직도 달리는 이 미우라라는 사나이를 이제는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볼 수 있습니다. 간바레 미우라! 당신은 정말 무서웠어요.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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