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자료
지난 9월12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의 경기. 3:0으로 뒤지고 있던 9회말 LG의 공격. 2아웃 뒤 정성훈이 2루타를 치고 나갔고 SK가 정우람으로 투수를 교체하자 LG 김기태 감독은 간판타자 박용택의 타석에서 갑자기 신인 신동훈을 대타로 내세웁니다. 놀랍게도 이 선수는 투수이며, 타격의 의사 없이 멀뚱멀뚱 서서 3개의 스트라이크를 바라봅니다. 그것으로 경기는 끝났습니다. 중계진도, 승리한 SK 선수들과 이만수 감독도, 맥없이 끝난 승부에 어리둥절해합니다.
김기태 감독은 SK가 9회 2아웃 뒤 투수 이재영을 빼고 특급 마무리 정우람을 등판시키자 “SK가 우리를 우습게 봤다. 우리 팬들과 팀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 그랬다”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깥의 시선으로는 잡아내지 못하는 누적된 분노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김기태 감독의 선택으로 자존심을 지킨 LG 팬과 선수는 없어 보이며 남은 건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부과한 벌금 500만원이었습니다.
2006년 9월18일, 메이저리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LA 다저스의 경기. 9회 2아웃까지 9:5로 뒤지고 있던 다저스는, 거짓말처럼 솔로 홈런 4개로 동점을 만듭니다. 뒤이은 연장 10회초에서 1점을 내줬지만 10회말 노마 가르시아파라의 역전 투런 홈런으로 마침내 경기를 뒤집습니다. 한국 프로야구의 9회말 2아웃 뒤 최다 점수 차 역전승은 2002년 4월10일, 5:1로 지다가 2아웃 이후 5:6로 뒤집은 롯데 자이언츠의 4점 차 역전승입니다(롯데는 그해 꼴찌 팀입니다). 그러니까 야구에서 3점 차는 감독이 함부로 장난칠 수 있는 스코어가 아닙니다. 제가 더 눈에 밟히는 것은 대타로 나와 광대 노릇을 해야 했던 신인 ‘투수’ 신동훈입니다. 평생에 걸쳐 꿈꿔온 프로야구 데뷔 무대를 마운드가 아니라 타석에서 맞을 줄 꿈에라도 상상했을까요.
2009년 5월12일, SK에 9:1로 뒤지던 LG는 9회말 8점을 뽑아내며 기적 같은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연장전에서 패했지만 그 경기는 LG 트윈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때 팬들 사이에 LG 트윈스의 애칭은 ‘추격쥐’였습니다. 자주 졌지만, 끝까지 추격의 고삐를 멈추지 않던 그 시절의 LG 트윈스는 멋있었습니다.
상대방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남자들은 상대를 조롱하기 위한 농담을 생각합니다. 김기태 감독의 선택도 일종의 농담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틀렸습니다. 자존심은 룰을 지킨 자의 특권이며, 항의는 끝까지 최선을 다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자격입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요기 베라의 말은 야구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룰입니다. 남은 시합에서 20연승을 한다면 LG 트윈스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감독에겐 꿈같은 얘기겠지만, 야구팬들은 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꿈꿉니다. 팬들이 포기하지 않은 것을 감독이 포기한 것. 올해 김기태 감독의 결정적 실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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