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분업이 이루어진 현대 야구에서는 모든 직업을 통틀어 가장 잔인한 보직이 있습니다. 속칭 ‘패전처리’라 불리는 투수들입니다. 야구는 이기기도 힘들지만 무사히 지기도 어려운 경기입니다. 승부가 완전히 넘어간 시합이라도 시간만 때우면 질 수 있는 경기가 아니라, 어쨌든 27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야 ‘마침내’ 질 수 있습니다. 승패가 상대팀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등판해 누더기가 된 시합을 정리하는 패전처리 투수. 이들의 등판은 복싱으로 말하자면 링으로 수건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롯데 자이언츠와 SK 와이번스의 경기가 있던 지난 8월29일 밤, 평소라면 퇴근 뒤 프로야구 중계를 보러 집으로 향했겠지만 그날 선발투수를 확인한 저는 야구를 포기하고 친구를 불러내 술을 마셨습니다. 2위 싸움이 한창인 중요한 시기에 34살의 패전처리 투수 이정민이 선발로 나오니 그저 버리는 시합이라 생각했습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왔더니, 이정민이라는 이름이 그날 밤 모든 스포츠 뉴스와 인터넷 포털의 검색어를 석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정민 9이닝 1실점 승리투수’ ‘이정민 3254일 만의 선발승’ 등의 뉴스 타이틀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자이언츠 팬들에게 ‘이정민’이라는 이름과 ‘선발승’이라는 타이틀만큼 호환되지 않는 기사가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저는 그날 밤을 새워 11년차 패전처리 투수 이정민이 3시간 동안 지켜낸 그 시합을 ‘다시보기’로 재생했습니다. 그 밤, 이정민의 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타자의 무릎을 파고들며 포수의 미트를 찢어버릴 듯한 직구가 쉴 틈 없이 박히고 있었으며 춤추는 변화구에 타자들은 얼어버렸습니다. 손을 빠져나가는 공은 그야말로 ‘긁히고’ 있었으며 공 반 개를 넣었다 빼는 제구는 황홀했습니다.
승리투수가 되어 인터뷰를 하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처럼 울먹거리던 이정민의 목소리에 숨이 콱 막힙니다. 11년차인 저 선수의 육성도 저는 처음 들었습니다. 매번 패전처리로만 나오니 수훈선수 인터뷰를 할 일도 없었으니까요. 2003년 이승엽에게 아시아 신기록이 된 56호 홈런을 맞으며 마운드에서 고개 숙인 뒷모습으로만 기억돼 있던 선수, 남들은 일주일에 두 번도 하던 선발승을 9년, 3254일이 걸려 해낸 이 선수, 등판만 하면 난타당해 ‘새가슴’으로 불리며, 박찬호를 닮았다고 하여 ‘짭찬호’라는 조롱 섞인 별명이 붙어다니던 그 선수가 모두가 포기하고 기대를 버리며 쳐다보지도 않던 시합에서, 3254일이 걸린 승부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2012년 8월29일 밤에, 34살의 패전처리 투수 이정민이 던지던 ‘미친’ 직구야말로 우리가 야구에 전율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세상의 모든 패전처리 투수들은 최소한 3254일 동안은 야구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사직아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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