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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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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로 난입한 회장님

“한화 우승!” 외치게 한 그분의 촌극
등록 2012-06-06 13:53 수정 2020-05-03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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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6일 두산과 한화의 경기가 열린 서울 잠실야구장. 극적인 역전승을 일궈낸 한화 이글스의 선수들이 경기가 끝나자마자 더그아웃 앞에 원을 그리며 도열하고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장난 어린 하이파이브도 하고 응원해준 관중에게 손을 흔들며 기쁨을 나눌 시간이지만 선수들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기장 안으로 한화그룹 김 회장이 등장했습니다.

한대화 감독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김 회장을 의전하며 선수의 이름을 소개해줍니다. 회장님은 악수를 해주고 노고를 치하해줍니다. 전설의 박찬호도, 조선의 왼팔 류현진도, 돌아온 4번 타자 김태균도, 용병 바티스타도 모두 경직된 자세로 회장님께 공손히 인사를 드립니다. 선수단이 회장님 앞에 도열해 있을 때, 경기 내내 선수들을 응원한 관중은 조용히 자리를 떠서 집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TV로 생중계됐습니다.

야구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스포츠입니다. 구단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서는 그룹의 지원이 결정적이며, 그룹이 갑자기 야구단을 접겠다고 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야구선수들은 결국 1년짜리 비정규직 노동자일 뿐입니다. 선수들 처지에서 회장님은 밥줄을 쥐고 있는 분이니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회장님 앞에 얼어 있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팬들은 야구장이 꿈과 환상이 가득한, 현실의 도피처가 아니라는 것을 퍼뜩 깨닫게 됩니다.

팬들에게 류현진과 김태균과 박찬호는 현실 밖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영웅이지만 그들도 사실 회장님 앞에 두 손 모으고 서 있어야 하는 피고용인이라는 현실은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3시간이 넘는 혈투를 치르고 땀범벅이 되어 씻지도 못한 꾀죄죄한 모습의 선수들이 말끔한 모습의 회장님을 의전하는 모습에서는 이상한 비애까지 느끼게 됩니다.

김 회장은 “프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류현진에게 “한화 우승!”을 선창하게 하는 리틀야구단 같은 촌극을 연출했다고 합니다. 바티스타 보기 부끄럽습니다. 이제 프로야구는 공공재입니다. 야구단 운영이 적자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1년 133게임 전부가 TV로 방송되고, 선수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홍보용 스티커를 붙여놓은 것만으로도 그룹은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홍보 효과를 누립니다. 그 정도에 만족해줬으면 합니다. 불편한 주인 행세는 선수와 팬들의 시간을 방해합니다.

야구장의 VIP는 선수입니다. 그들과 함께 소리친 팬들입니다. 경기는 1회부터 9회까지지만, 팬들에겐 야구장에 입장해서 퇴장할 때까지의 모든 것이 야구입니다. 엄밀히 말해 회장님은 그라운드로 난입해 선수와 팬들의 시간을 방해한 것입니다. 어떤 팬도 회장님을 보려고 예매를 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팬도 선수들의 ‘쫄아 있는’ 모습을 통해 현실을 깨닫고 싶지는 않습니다. 야구장에서만은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 꿈의 주인은 회장님이 아니라, 선수와 팬들입니다.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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